▲ 임 성 택 목사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애 4:1,2).”
대통령이 형사범으로 소추되어 탄핵받은 초유의 사태에서도 어김없이 다가온 연말연시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 이미 이곳저곳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 송구영신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지금, 여전히 올해도 크리스마스의 애가(哀歌)를 부르자는 필자를 너무 탓하지 말라. 벌써 10여년이 넘게 늘 이때가 되면 “올해 크리스마스는 금식하며 울자”라고 이곳저곳에서 설교하고, 글을 기고해 왔다. 금년에도 그 심정에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 간절한 것은 굳이 필자만의 심정은 아니리라.

어찌 성탄의 고귀한 날이 인류 타락의 날이 되었을까? 저 휘황찬란한 밤거리에 크리스마스 패션으로, 신나는 기분으로 돌아다니는 저 청춘들에게는 아마 크리스마스가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합친 날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모든 유흥업소가 교회보다 훨씬 먼저 트리를 장식하고 캐럴을 울리지만, 정작 그 하는 모양이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니, 이 날이 성적 타락의 절정을 이루는 날이 되고 말았음이 통탄할 일이다.

그들은 교회의 성탄, 곧 구주의 탄생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서 크리스마스는 성탄의 의미가 빠진 낭만으로 포장된 쾌락과 방종의 날일 일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애써 이를 외면한다. 아니 이제 교회마저도 두 개의 크리스마스, 곧 교회의 성탄과 세속의 크리스마스를 공인하려는 모양이다. 혹자는 이미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담을 넘어 세속적 명절이 되었다며 이런 분위기를 당연시한다. 살펴보면 어디에도 이토록 모욕적인 성탄 분위기를 성토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없다. 이러한 교회의 무책임한 대응은 아무리 교회가 성탄을 축하하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외치며 구주의 오심을 새벽부터 증거해도, 주(酒)를 높이 들고 그들의 쾌락을 찬양하는 타락한 세속적 크리스마스 숭배자들의 일탈을 막을 수 없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자기비하의 날이다. 이 날은 구속사역을 완결하심으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위의 인간들에게는 평화의 날이 되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수모를 당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이라! 이 사건을 인간이 벌레가 되는 사건에 비기겠는가? 성탄절은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 가장 저주받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날이다.

양심적인 성도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조금만이라도 바라본다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엄청나고 송구한 사건인지, 그래서 모두가 머리를 풀고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아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해, 추악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고귀한 주님을 생각하며 금식하며 통곡해야 마땅함에도, 급기야 일부 교회마저도 그 주님의 심정을 읽어 드리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에 세속적 기쁨에 동조하고 들떠 흥청거리고 있다.

성숙한 교회는 이 성탄을 통회하고 자성하는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시대의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가?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가 모든 민초들에게 스며들고 있는가? 이 시대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우는 자와 얼마나 함께 울었으며, 아파하는 자와 얼마나 함께 아파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금과 정금이 빛을 잃고, 고귀한 것이 질그릇 취급받은 이 날에 부르는 필자의 크리스마스 애가(哀歌)를 너무 탓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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