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의 신사참배 광경.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위에 있는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거스르는 것이며, 따라서 거스르는 그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통치자가 두려울 것이 없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만 두려움이 된다 …(아하 생략)”(로마서 13장 1-7절)

이 성경구절은 2000년 동안 통치자들에게 철저하게 악용되어 왔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성경구절을 내세워 권력자들과 결탁하고, 교회와 권력이 야합하는 등 어용교회를 만들어 냈다. 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잘못된 정치권력을 비호하며, 민심과 교인들의 뜻과는 달리 오방과 악령에 빠진 대통령을 감싸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성직자 가운과 후드를 착용하고 아무렇지 않게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결과 일 것이다.

사실 한국기독교는 이 성경구절을 내세워 잘못된 군사정권과 독재정권을 비호하는데 앞장서 왔다.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식민지세력을 정당화 해 주었고, 선교사들은 조선의 백성들을 향해 회개와 구원, 그리고 도덕적 계몽운동을 강조했다. 문제는 감리교를 비롯한 장로교 선교사 대부분이 그랬다.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는 일본 통독부에 맡기고, 선교사들은 조선백성의 도덕적인 계몽과 교육사업에 전념, 조선의 식민화 정책에 적극 협력한다”(박순경박사, 한길사, <민족통일과 기독교>는 선언문을 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영미 팽창주의의 친위대로 온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조선백성의 정치참여와 의식화를 철저하게 막았다.

이러한 교육과 사상의 영향 이어받은 한국개신교의 지도자들은 정치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인권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정치목사’로 매도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잘못된 권력자들을 위한 조찬기도회 등을 개최, ‘정치목사’보다 더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은 불의한 왕을 향해 예언활동을 벌였던 예언자의 정신을 상실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호화로운 교회당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두어 버렸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성전 하나님’, ‘성전 예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들이 바로 오늘 교회의 주류가 되어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정죄하고, 독선적인 모습만 보이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소금의 맛도 내지 못하고 있다.

최태민-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해 보수적인 교회와 진보적인 교회 사이, 목회자와 교인 사이, 교회와 불의한 정부 사이, 불의한 정부와 국민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는 오늘 이 성경구절이 담고 있는 뜻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다시한번 생각해야 할 성경구절이며, 이 성경구절은 재해석 되어야 한다.

분명 이 성경구절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과 갈등, 오방과 악령에 길들여진 불의한 정권을 비호하는 이상, 한국교회는 교인들과 국민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가져다가 줄 수 없다. 특히 작은 것을 품지 않고, 마치 자신들이 주류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형교단들의 횡포가 계속되는 한, 교회를 통한 정치개혁, 사회개혁, 경제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성경구절은 정치가 국민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고, 개인적인 의식이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교인들과 국민들에게 혼란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교인들은 오방과 악령에 빠진 불의한 정권에 향해 아우성치고 있는데, 교회지도자들은 이를 외면하며, 오히려 불의한 권력을 비호하기에 바쁘다.

불의한 정권의 2중대인가(?)

오늘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인 입김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문화, 사회, 경제 등 정치적 영향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역시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스포츠, 종교 등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여기에 관련된 정치인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또 긴급 체포되어 구속되는 사태까지 줄을 잇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됐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촛불민심이 크게 작용했다.

국민들은 잘못된 정권을 향해 예언자적인 사명을 갖고 아우성치는데, 교회지도자들은 잘못된 권력을 비호하기에 바쁘다. 잘못된 정권을 비호하는 집회에 여지없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국민적 갈등의 중심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을 향해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한다. 또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국민들을 ‘빨갱이’, ‘좌경’, ‘용공’으로 매도한다. 심지어 북한 김정은의 지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한다. 누군가는 대의민주주의를 가리는 직접민주주의를 향해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앞으로 이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며, 국민들의 삶은 지쳐만 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불의한 정권을 향해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구약성서는 예언자들의 활동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불의한 정권과 사이비 종교지도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징계를 경고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무엘은 세워질 왕의 잘못도 적나라하게 예언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방비를 만들게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 (중략) …그 때에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짓겠지만 그날에 야웨께서는 들은 채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공동번역 사무엘상 8장11-18절)

사실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은 오방과 악령에 빠진 불의한 정권을 감싸면서도, 종교인 과세문제 등에 대해서는 현 정부와 맞서 왔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온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또한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철저하게 보여주었다. 한국개신교는 최태민목사 - 최순실 게이트가 언론을 통해 폭로된 당시, 일제히 박근혜 대통령을 감싸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것은 문화체육부가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문체부 전 장관과 차관이 구속되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문체부의 지시를 받는 한국개신교의 이 같은 입장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계문제에 대해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하면서, 잘못된 정부를 옹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권력과 결탁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가 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닫아주기는커녕,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통해 부자가 된 기업가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기도를 해 준다. 이렇게 한국개신교는 교회의 외형을 키워왔던 것이다.

교회 교인들이 정치권력보다 우위

오늘 산업화된 시대에서 국민들의 생활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상호의존적이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농사해서 밥을 먹여주고, 어머니가 길삼해서 옷을 입혀주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농사를 지어 밥을 먹여주는 사람은 농부이며, 옷을 입혀주는 사람은 방직공장의 여공과 미싱사이다. 이렇게 국민들의 생활이 상호 의존적이다. 따라서 국민의 사회생활을 관리하고, 계층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생활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신앙적, 교회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권력의 시녀노릇, 아니 불의한 정권의 2중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의한 정권이 종교인 과세문제를 비롯한 이슬람 확산 등의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오히려 불의한 정권들이 개신교를 악이용 해 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 성경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분명 권력에 복종하고, 권력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임에 틀림없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을 무시하지 말고, 존경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구불변의 교리처럼 되어 버렸다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 성경구절은 한국선교 130년 동안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되어 왔다.

오늘 천박한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권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권력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목회자와 장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축복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같이 말한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겉으로 양심과 정의를 가장 많이 외치는 한국개신교가 변화될 수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별신, 떠돌이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 그리고 사회법이 하나님의 법 위에 둘 수밖에 없다. 잘못된 권력을 비호할 수밖에 없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세월 나라없는 식민지 속에서 억압과 수탈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했다. 또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이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또 이스라엘민족과 약속했다. 그것이 계약법전이며, 율법이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세워 준 것(?)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절에서 위 성경구절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교회 내부의 문제는 교인들 사이에서 해결해야지 법정에 고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다. 오늘 변호사들이 교회 때문에 먹고산다는 말까지 나온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는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법정, 아니 정치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더 나가서는 세상법정의 법관들은 교회가 명시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당시 로마의 관리들은 뇌물을 좋아하는 부패한 자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권력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은 세상의 정치질서를 완전히 무시하고, 권력자를 멸시하는 경솔한 열광주의자를 향해 경고한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 나라들에서 하나님나라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속해 있다.(요한복음 17장 16절)

“모든 권력이 하나님이 세워 준 것”이라는 말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고, 하나님에게 봉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점을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이 안다면, 위 성경구절을 악용해서 불의한 정권을 비호 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신적인 것으로 백성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오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모든 권력은 국민을 위한 것이다. 바울의 말을 약간 고쳐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 것이며, 모든 국민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1988년, 도서출판 천지, 박재순저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모든 통치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기 전에 국민의 심부름꾼이며,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 국민의 심부름꾼 노릇을 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권력의 최고봉에 서서 국민들을 발아래 두려고 하는 행위는, 스스로가 하나님 위에 있다고 자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섬겼듯이 통치자들은 국민의 가려운 곳 하나하나까지 긁어주겠다는 심정으로, 국민의 심부름꾼의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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