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A씨(27세)가 설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세상에 태어난 지 100일된 아들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 안방에 전해졌다. 숨진 여성은 남편을 가정폭력 가해자로 3차례나 신고하고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 남편은 사법처리를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이 여성의 이웃은 누구이며,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린 우리사회의 자화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여성이 아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과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묻게 한다.

이 여성에게는 진정한 이웃이 없었다. 이 여성에게도 부모도 있었을 것이고, 형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도,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웃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3번에 걸쳐서 신고한 경찰서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 여성에게 진정한 이웃이 아니었다.

분명 이 여성과 생후 100일된 아들은 진정한 이웃이 없는 인정이 메마른 오늘 현대사회가 ‘죽임’을 당하게 방치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여성이 이웃으로 생각했던 가족도, 친구도, 경찰도, 진정한 도움을 주어야 할 사회복지사도 진정한 이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 여성을 죽임으로 내몬 가해자는 우리 모두이다.

이 여성은 경찰조사 결과 상습적인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지난 7월부터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3번에 걸쳐 남편에 의한 가정폭력을 신고 했다. 이 여성은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가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했다. 3번에 걸친 신고 당시는 이 여성이 임신 중이었다는데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 가정폭력의 경우,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에 의해 사법처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이 여성에 대해서 경찰이, 사회복지사, 상담사, 이웃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도, 이 여성과 생후 100일된 아이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민다. 가정폭력 가해자의 경우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적인 처벌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도,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죽임’으로 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 여성의 ‘죽임 당함’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정폭력은, 피해 여성들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힘없는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임’을 당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 되면 가해자에 대한 형사 처벌 절차가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가정폭력 가해자는 자동 기소되며, 피해자와 격리 조치된다. 당연하다. 가정폭력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가정으로 다시 돌려보냈을 경우, 가정폭력이 악순환으로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반의사불범죄’에 의해서 가정폭력에 여성들과 아이들이 시달리고 있다.

‘가정폭력범죄와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9조’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사실상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처벌할지 아니면 안할지를 결정하라는 의미에서 활용되고 있다. 오히려 이 법은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을 ‘죽임’ 당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가정학자들은 미국과 같이, 경찰이 신고를 받아 출동하여 가정폭력 정황이 들어나면, 무조건 체포한 후, 의무적으로 기소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을 지키고, 해체되는 가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여성과 아이의 죽임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 땅의 모든 여성과 아이들의 아우성이며, 이 아우성을 듣지 못한 이 땅 국민 모두는 가해자이다. 무게의 중심을 나에게 두고 있는 오늘 현대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동생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무게의 중심을 내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게 두라고 했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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