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설립 기념사업으로 만주에 선교를 개시했고 1933년 제22회 총회는 북만주 강변에 사는 동포전도로 ‘한경희’ 목사를 파송했다. ‘장장림’ 휘하의 군대가 있고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대가 주둔해 있는 반면, 대한 독립 쟁취를 위하여 만주에서 투쟁하는 독립당이 있는가하면 같은 동족으로 공산당이 되어 독립당과 싸우는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국내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므로 친구들은 한 목사에게 그 지대는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한경희’ 목사는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며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주에 부임하여 그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외로운 동포 하나하나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는 1935년 1월 1일 정초임에도 불구하고 북만주 호림현(虎林縣)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다. 교인4명과 함께 썰매를 타고 1월 4일에 오소리 강변을 지나다가 공산당 비적을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돈을 빼앗으려고 희롱하다가 목사임을 알게 되자, ‘한경희’ 목사 일행을 강물에 얼음을 깨고 쓸어 넣어 수장한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과 피까지 만주선교에 바쳤고 그 시신조차 간곳을 모른다. 그런데 이에 참으로 놀란 것은 ‘한경희’ 목사 아들 ‘청옥’이가 공산당원 이었던 것이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삼원포를 중심하여 만주전역 민족진영 을 박멸하는데 전력하였다. 그 후 ‘한청옥’은 공산당들과 마주 앉아 민족진영 토벌을 계획하는 자리에서 민주진영의 한 청년이 권총을 들고 들어와 ‘한청옥’의 등을 쏘아 죽였다. 아버지 ‘한경희’ 목사는 공산당에게 죽고, 아들 ‘한청옥’은 민족진영에 의해 죽었으니 사상적 대립은 이처럼 크나큰 비극을 초래했다.

‘한경희’ 목사의 차남 ‘순옥’이도 당시에는 공산당이었으나 아버지가 참형을 당한 후 다시 교회로 돌아와 1944년 만주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평북 양시교회의 부목사로 봉사하다가 8 . 15 해방 후 공산당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일제 36년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낳은 참담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로인하여 우리는 남북 분단의 아픔 속에 있음도 모자라,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의 대립이 극렬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오히려 대립각을 더욱 부추기는 인상을 주는 일부 교계 지도자들에게서 과연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잠식해 버리는 마당에 개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우리가 외치는 그 외침들이 개혁적 고백이라 할 수 있을까?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물론 신앙적 의견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상적 틀에 매여 우파목사, 좌파목사 운운하는 논리에 의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직 사상적 대립에 의한 비극의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아 우려를 갖지 금할 수 없다. 여과 없이 외쳐대는 외침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며, 함대와 함대가 함께 침몰하자는 식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갈 뿐, 평화로운 항해를 위한 모습들은 찾아 볼 수 없다는데 ‘대한민국 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보수이든 진보이든 “국민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안보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북괴와 대치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이제 감정에 치우친 남남갈등의 사상적 대립은 종지부를 찍음으로, ‘한경희’ 목사 가족의 비극과 같은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발생되지 않도록 기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명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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