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문명의 이기와 힘의 철학인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떡이나, 돈이나, 섹스는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은 상막하다.

떡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은 떡은 돌로 만든 떡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돌 가슴이 되어버렸다. 메마르고 냉정하다. 정이 메말라 버렸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랑을 하기에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기에는 우리 가슴이 너무 메말라 버렸다.

우리는 소유욕과 괘락에의 욕구에 내맡기고 상막한 삶을 살고 있다. 물질의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예수님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손이 범죄하게 하면, 손을 끊어 버리라고 한다. 그것은 손이 내 의지를 직접 실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소유욕을 충족시키려 부정한 재물을 움켜쥐고 지배욕을 충족시키려고 강권을 휘두른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이웃을 죽음으로 내몰고, 폭력을 휘두른다. 한마디로 손을 끊으라는 말은 내가 가야 할 길을 벗어나 그릇된 길로 빠져드는 유혹을 잘라 버리라는 말이다.

눈을 빼란 말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감각적인 욕심에 끌려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뚜렷한 주체성을 가지란 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외부적인 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새로운 눈을 뜨라는 말이다. 하지만 돌 가슴을 깨부수는 일, 돈이나 이기적 욕구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일은 고독하다. 아프다. 그것은 소유욕과 쾌락에 잠겨 사는 수동적이고 낡은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또 결단이다. 이것이야 말로 물질적인 토대에 안주하는 비겁한 행위가 아니다. 순수한 존재에의 용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쓸쓸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노숙자, 이주민 등 보잘 것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 외롭다. 외로울 때마다 바보처럼 느껴지고, 어리석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요즘 여자들 모임의 면면을 들여다가 보면 더욱 그렇다. 여자들은 주식을 투자하여 얼마가 남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부동산을 어디에다 투자했더니 몇 배가 튀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민권 투쟁가 장 파토카는 “기회나 사정, 또는 돌아올 이득에 구애되지 않는 확신 없이는, 도덕적 기반 없이는 고도의 산업기술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손을 끊고, 발을 끊고, 눈을 빼는 확신 없으면, 인간다운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회나 사정, 이해득실에 구애되지 않는 확신은 바로 손과 발을 끊고, 눈을 빼는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소유욕과 쾌락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며, 항상 눈에 보이는 쉬운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질적인 삶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며, 용기있게 위선을 벗어버릴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중심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은헤로 살아가게 된다.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뺌으로써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된다.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빼라는 말은 억압과 수탈의 악순환을 끊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또 정치․사회․경제의 벽과 쓰라린 분단의 벽을 무너트리라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재물에 의지하여 돌로 만든 떡을 먹는 것과 또 하나는 이기적이며, 안락한 삶에 빠져든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전자는 이기적인 탐욕의 노예가 되어 손과 눈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다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에 빠져든다. 후자는 억압과 수탈의 악순환에 사로잡힌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 진정한 사람의 나라가 동터오게 된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