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에스겔은 유다를 둘러싸고 강대국들이 세력다툼을 벌일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예언자였다.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인들에게까지 희망을 주었다.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고 설파했다. 이방인들은 포로가 된 에스겔을 조롱하고, 희롱했다. 천사가 에스겔을 데리고 간 곳은 지성소가 있는 곳이었다. 구약 에스겔 47장 1-12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인간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물질의 증식을 멈추지 않았다. 제의적 성격의 물질은 기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생계걱정을 하다가 3모자가 죽어도, 탈북민 모자가 죽어도 아무 감동이 없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초대교회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은 유대교 과부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과부들의 고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은 물질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의적 물질에 대해서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의 피조물들이 힘겨운 삶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부터의 탈출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파라오로부터의 탈출 역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이스라엘은 이방에서 온 사람을 배척했다. ‘선민사상’에 찌들어 사랑으로 받아주지를 못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차별받는 이들, 외국인 근로자, 큰 뜻을 품지 못하는 이들, 가난하여 희망을 갖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지 못했다. 성서는 원한으로 사무쳐야 하는 이들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편 32편5절) 아멘.포르투갈계 네덜란드 철학자이며, 유대인 공동체에서 성장하였으나, 그의 비판적인 사상 때문에 네델란드에서 추방된 바뤼흐 스피노자는, "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이 미덕의 첫 단계이자 유일한 기본이다"고 말했다. 우리의 삶은 서로 이해하며,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헌데 이를 망각하고 살기 때문에 이웃과 다투고, 가족 간의 재산싸움 등을 벌이며, 불협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다린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이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빌론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이사야 52장 7-10절)“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성서에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꿈을 가진 민족은 미래가 보인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꿈을 꾸며, 미래를 열어왔고, 열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성서 욥기 8장 7절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분단된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남북한 민족은 남과 북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서 나에 대해 기록된 모든 일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였다.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3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
사람은 살아가면서 잔꾀를 부리다가 넘어지는 것을 종종 본다. 우리 주변에 지혜는 없고, 잔꾀만 부리는 사람이 있다. 잔꾀를 부리는 사람은 얼핏보면,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실체가 드러난다. 잔꾀는 한순간을 모면하려는 것이고, 지혜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것이다. 잔꾀는 자신만의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지혜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남에게 뒤집어 씌운다.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잘못과 시행착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보니 나의 불행과 잘못 때문에 타인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마디로 나의 불행과 잘못을 스스로 받아드리지 못한다. 자신의 불행과 잘못을 누구를 탓하지 말라는 애기다. 자신의 불행과
할렐루야 예수 부활 하셨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며, 승리하신 분이다. 성서의 말씀,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힘이다. 성서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한 현대교회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을 교회당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쓴다.이제 교회의 사이즈는
선교초기 한국에 들어온 일부 영미선교사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알렌의 행보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3.1만세운동에 협력적이었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몇 명의 선교사는 한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드린 것에 대해서
사순절이 시작됐다. 사순절 기간 교인들은 절제된 생활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요즘처럼 죽임당하는 아이들에 대한 언론보도가 많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죽임당하는 아이들의 피맺힌 ‘피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 적도 없다. 잘사는 나라의 아이들은 부모의 이기와 욕심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가난한
우리에게 진정한 이웃이 있는가(?) 가끔 필자인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한참 고민에 빠져본다.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이웃, 너의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나에게 있는가를 지난 날들에서 찾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릴 수 있는 이웃,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찾으려고 해도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 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9~11)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의 삶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 받은 은총에 응답해야 한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다. 복음의 빛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늘의 소리는 마음이 정화된 자만이 들을 수 있다. 빛은 스며드는 성질이 있다. 빛은 가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희망으로 다가
“누구나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에이브러햄 링컨-BC 4세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라 왕과 부하 다모클라스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다모클라스와 백성들은 디오니시오스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육에 필요한 약식도 필요하지만, 영에 필요한 양식도 필요하다. 육의 양식, 물질은 형제간, 이웃간, 친구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교회 내에서도 목사와 교인간의 갈등, 장로간의 갈등, 연합단체간의 갈등도 일어난다. 추수감사절은 성령으로 복되고 기쁨의 축제이다. 아르답고 복된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이웃의 아픔에 함
“누구나 거의 다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에이브러햄 링컨-BC 4세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라 왕과 부하 다모클라스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다모클라스와 백성들은 디오니시오스라 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