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에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좁은 문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나중에는 길이 점점 좁아져서 홀로 걷기도 어려운 험로가 될 개연성이 높다.참 어려운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왔다. 이런 형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그 길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나의 구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인생의 교차로를 만난다. 교차로에는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반드시 어느 한 길을 속히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설 때가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선택에 따라서 인생과 그 종국이 결정 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두 길이 있다고 하신다. 하나는 좁은 길이요, 다른 하나는 넓은 길이다. 그 길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가 죽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인류를 귀히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귀히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지금처럼 한 사람의 인격이 도매금 취급을 당하는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점점 인간을 경시하는 풍조가 이 시대에 만연되는 듯하여 위기의식을 갖게 한다. 어느 조사에서 응답자의 90%가 지금은 위기라고 말했을 정도로 위기의 체감도가 높다. 인간 경시풍조는 인간 존엄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내놓는
성경의 숱한 인물들 중에 특이한 인물이 야곱이다. 젊은 날의 그는 술수에 능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형을 속이고, 아버지까지 속이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 인물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거침없이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14년의 세월을 기꺼이 헌신할 수도 있는 정열
에베소교회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데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전부를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랑은 마지막을 완결시키는 능력을 가졌고, 사랑만이 가지는 독특한 맛이 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세계적인 도시였다. 이런 유명한 도시에 있는 교회이다 보니 자연히 다른 지역교회에 비해 상대적으
젊은 날에 최악의 고난의 시절을 보냈던 다윗 왕이 남긴 신앙 시 중의 한 편의 시가 시편24편의 말씀이다.시편 23편은 4절부터 시점이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뀐다. 3인칭은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할 때 사용되며 1인칭은 주관적인 경험과 고백을 전달할 때 사용된다. 이렇듯 시점의 전환은 우리로 하여금 시인의 믿음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인도하며, 멀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그 제사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섬김과 봉사를 가리킨다. 교회는 주님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먼저 극진히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믿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 봉사하는 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원리가 있다.
메시야께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별을 따라 온 박사들이 유대와 그 시대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다!"는 것(마2:1~12)이다. 아무리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도, 그 부모가 무명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 아기는 만왕의 왕이시라고 단언한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 그대로 왕이 나셨다(렘23:5). 마태는 왕 중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셨음을
대강절 첫 주일을 시작으로 성탄시즌을 맞이하였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선지자 이사야도 예수님을 평강의 왕으로 소개 하였다. IS(Islamic State-이슬람의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가 이끄는 조직으로 알카에다 이라크지부에서
근본,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사람에게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롬1:21, 딤후3:2). 그렇지만 누구라도 예수 믿고 거듭나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거룩한 변화를 이루게 된다. 결국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무리는 성도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 감사를 더없이 기뻐하시는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을
많은 이들이 멘토와 멘티 관계를 맺으려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인다. 기업들 중에도 ‘멘토링 시스템’을 도입해서 선배사원과 후배사원을 멘토와 멘티로 연결해서 자매결연을 하게하고, 멘토와 멘티의 신뢰관계를 통해 기업 효율성을 높이면서 Win-Win하게 하여, 기업의 추구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기를 바라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멘토는 남의 인생을 잘 이끌
스피치(speech)하면 으레 서양의 한 학문의 장르이려니 생각하는데, 동양권에서의 스피치도 있다.물론 상황과 분위기가 다르다. 중국의 철학이 느껴지는 스피치의 예화는 무척 많다. 마치 우화 같기도 하다. 중국 이하 아시아권의 스피치는 이렇듯 예민한 인간의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무수한 세월이 지나도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는 삼국지의 그 수많은 전략과 기획,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리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선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오히려 "하나님, 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까? 주님,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의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 당연하다. 베드로전서 2장9절은 이
젊은이들은 인생의 끝을 의식하지 못한다. 영원히(?) 살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인생 운운해도 깊이 있게 인생을 살피고 정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젊은 것이고, 젊음은 힘이 있어 좋다. 우리네 한 평생이 그렇게 길지도 않은데도 한길을 꾸준히 살기란 참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맥없이 지나쳐 버린 세월인데 순간순간은 왜 그리도 버거운 날들이고, 잠
전도훈련을 하는 어느 자리에 성도들을 이끌고 참석한 목사들 중에 제법 많은 이들이 전도의 현장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요령(?)을 피우거나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실로 오늘의 한국교회 현 주소를 실감나게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컸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전하도록 우리의 입을 열게 하는데 반해, 마귀는 한사코 입을 다물게 한다. 마귀가 우리의 입을
로마서의 서론을 지나 본론은 1장 18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본론의 서두가 “하나님의 진노”다. 하나님이 진노의 신(神)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저항감을 보인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 중에 어떤 이는 진노와 사랑이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양립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지옥을 부정해 버리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감정에 아첨하는 얄팍한
그리스도인에게 경건이란 무엇인가? ‘예수 믿는 사람다움과 예수 믿는 생활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경건이란 단어는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을 구별하는 단어이기보다는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 신자다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여긴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경건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우리말 국어사전은 "공동체"(共同體)를 "생활과 운명을 같이하는 조직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라는 말과 함께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공동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공동체는 구성원들 사이의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교제를 전제한다. 이런 교제가 있기에 생활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정신없이 바쁜 이 성하(盛夏)의 계절에 목회자들은 오히려 고독에 빠지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디모데후서는 노인이 된 바울이 두 번째 로마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써 보낸 편지여서 이 편지에는 그 동안 철저히 절제되었던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마지막장인 4장에는 바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