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을 데려다가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 세워 달리게 할 것이다. 1천인 대장이나, 50인 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 할 것이다…(중략)…너희의 남종과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한마디로 나눔과 섬김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서의 경제정의이며, 성서의 중심사상이다. 특히 소외된 인간, 단절된 인간관계, 산산히 부서진 공동체를 치유하는 운동이다. 오늘 분열과 갈등으로 깨어지고 있는 한국교회를 보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예수님의 나눔과 섬김의 하나님나
영국의 산업혁명 이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본과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어 인간은 소외 또는 추방당하는 일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시대였다.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고, 자본가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자본과 결탁된 ‘세상 나라’는 그 자본가의 협조자의 위치에 있었다.그리스도교는 ‘두 나라설’의 충실한 수호자로서 문제의 본질을 느끼지 못하고, 옛 잠에서
요즘 대한민국의 목회현장과 교인들에 대한 성윤리의 타락현장이 끝을 보이지 않고 드러나고 있다. 이것 때문에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목회자가 부인을 살해하는가 하면, 않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특히 목회자와 교인들의 윤리적인 타락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리라”는 말씀의 높
예수님은 “저 들꽃을 보라”고 했다. 인간의 본분을 일깨우는 말이다.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현대문명에서 깨어나려면, 예수님이 말한 들꽃에서 배워야 한다. 현대문명은 자연과 단절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자연을 파고하고 오염시킨다.현대문명을 일으킨 과학과 기술 문명은 자연법칙의 일부를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기술 문명은 자연을 파괴하고 적대시 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등 모든 종교는 생명을 말한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생명에 대해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꽃이 시들어 지고 낙엽이 떨어지고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시체를 앞에 놓고 바라보며,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또 죽음의 문제로 고민해 왔다.인간의 존재는 한마디로 왜소하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있다. 몇십억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구체화될 때 비로써 가능하다. 구원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풀어 놓는 인간 해방을 말한다.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비인간화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무조건 죄인으
창세기 2장 26절-28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에 퍼져서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
‘양심’이란 두 글자는 분명하면서도, 그것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흔히 “양심에 손을 얹고 물어보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양심적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그렇지 않을 때 양심의 회의를 느낀다. 칸트는 양심을 “인간 내적 재판정의 의식이 양심이다”고 했다. 프로이드는 양심을 “감정적인 가치를 넘어선 인간행위가 갖는 제반
5월1일은 어린이주일이며, 5일은 어린이날이다. 그런데 금년도 어린이주일에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 할까 하고 망설여진다. 그것은 5월 가정의 달과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어린이들의 존엄성과 가치가 부모 아니 어른들에 의해 짓밟히고, 부모에 의해, 아니 계모와 계부에 의해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학대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매일매일 들려
전국 방장곡곡 어디에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은 없다. 슈퍼마켓만큼이나 교회당이 많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넘쳐나게 심어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건, 아니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와
5년전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제1원전의 수소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가 일어났다. 순식간에 2만여명의 희생자가 속출했고, 전국적으로 17만여명의 피난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후쿠시마 사고는 종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후쿠시마 제1원전의 모든 폐로 작업이 완료되기까지 최대 40년이 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통하여 민족들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좌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병신, 떠돌이들을 엄신 여기며, 이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참담하기 이를
예수님은 광야금식기도를 하면서 세 번의 시험을 받으셨다. 첫 번째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시험은 사단 앞에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첫 번째 시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 4:3)” 하고 유혹했다.굶주린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락한 인간을 생명이 충만한 에덴동산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구약학자들은 이것을 야훼 하나님의 역사 경륜의 목표라고 말한다.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것은 먹지 말라는 선악과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들도 선악을 아는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스
세상의 이혼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서로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했지만, 이제는 서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도 제각각이다. 우울증 등 정신적인 이유로, 경제적 사정으로, 혹은 신체적 질환 등 천차만별의 핑계를 들어 양육권 포기에 열을 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것 같다. 그 속에서 상처 받는 것은 부모에 의해 버림받는 아이들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민족구원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가진다. 그리고 기독교 선교의 가장 박해를 받았던 3.1만세운동은 민족사적,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운동은 1911년 105인 사건에 이어서 일본 지배자세력에 의해서 가혹한 탄압을 받은 두 번째 교회사적, 민족사적인 사건이다.3.1만세운동은 선교사들과는 상관없이 깨어난 조선의 지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가복음 2장 16절, 마태복음 11장 19절, 누가복음 7장 34절)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죄인(세리, 병든자, 가난한자, 소외된자, 여인)들과 음식을 먹는 장면을 많이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는데
양 100마리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고 했다. 양을 치는 목자에게 당연한 일이다. 이 비유는 잃어버린 하나가 다른 아흔아홉 보다 크고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즉 하나가 아흔아홉보다 크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일은 하나를 위해서 아흔아홉을 위험 속에 빠뜨리는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정치, 사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악하고 추한 사람, 병들고 못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 아닌가 싶다. 또한 이것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오늘 산업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 사회에 가치 있고, 유용한 사람이 아니면 낙오되고 버림받는다. 그것은 능률과 실질을 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