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자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아니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 나눔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교육하고 있다. 2025년도 부활절도 가난과 질병, 전쟁과 자연재해로 고난당하는 인류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다. 산불로 슬픔에 잠긴 국민들 속애서, 탄핵과 계엄정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들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시작됐다. 자신에게 갇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살해 당한자의 아픔을 모르고, 부활의 아침을 기다릴 수 없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활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마냥 기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아 안타깝다. 국민들은 좌우로 갈라져 이년갈등에 휩싸였고,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데 참담하다. 우리는 살해당한 자, 버림받은 자, 전쟁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 굶어죽는 남반부의 사람, 강진으로 고통당하는 미얀마 국민, 산불로 슬픔에 잠긴 국민을 그대로 두고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슬픔과 좌절에 잠긴 인간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주었다. 살해당한 예수님이 부활해서 인간에게 찾아 오셨다. 예수님을 살해해 돌무덤에 넣고 바위로 무덤을 막고 나서 로마군인들이 지켰다. 그런데 살해당한 예수님은 부활해 우리에게 나타났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버린 인간, 눈이 어두워진 인간들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소음에 길들여져 예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지배욕과 탐욕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드리던 부활절연합예배마저도 사분오열됐다. 각 단체별로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린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찬송을 부르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은 욕심이 가득해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교회를 분열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 모두가 전쟁과 기아, 지진, 산불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며, 사랑한다고 외친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구에 불과하다.

사분오열된 인간의 가능성이 끝나는 곳에서, 전쟁과 기아, 산불과 자연재해로 절망 속에 있는 곳에서, 유대의 권력자들과 로마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남김없이 다한 곳에서, 제국에 의해 힘없는 자들이 유린당한 곳에서,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은 한민족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계엄과 탄핵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새 봄, 생명의 계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나님은 인간이 설치한 장애물 걷어내고 예수님 살렸다
예수님의 부활,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희망

하나님은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설치한 장애물을 거둬내고, 살해당한 예수님을 살렸다. 인간의 절망과 좌절을 뚫고, 모든 것을 허무에 빠트리는 죽음을 깨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렸다. 예수님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살해당한자의 부활은 모든 가능성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죽음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부활을 경험 할 수 없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미래로 나갈 수도 없다.

이제 계엄과 탄핵의 터널은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죽음은 인간을 일정한 틀에 가두어 놓는다. 죽음의 세력은 죄와 율법을 통해 인간을 지배한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들은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히고, 율법적 강제를 당하게 된다. 사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있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지배욕이 강한 사람, 정치인들에게 자신을 강제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서 부활절연합예배가 사분오열돼, 단체별로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린다. 갈라진 부활절연합예배를 연합예배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욕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있다. 이들은 결국 율법적 강제를 당하게 된다는 성경의 교훈을 망각했다. 성령을 몰각했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 보수연합단체는 분열의 늪에 빠져, 4개로 분열됐다. 그것도 모자라 부활절연합예배마저도 분열시켰다. 탐욕에 길들여진 나머지 한번 준비위원장을 맡으면, 내려놓을 줄을 모른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림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깨트리고 죄와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망각했다. 불의한 권력을 감싸며, 권력의 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려왔고 누리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계엄과 탄핵의 정국서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며, 이념적 갈등을 부추긴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국민들의 아픔을 모르는 한국교회의 앞날이 걱정되는 이유이다.

죽음의 세력은 죄와 율법 통해 인간 지배

하나님은 살해당한 예수님을 살림으로써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가 주었다.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약속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약속했다. 불의와 거짓을 지키려고 총과 칼을 잡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패배를 선포했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인간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고 교육하는지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진리 편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총과 칼을 가지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불의한 사람들의 싸움판이었다. 욕심 많은 인간들은 언제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총과 칼을 휘둘렀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죽음이 궁극적인 것이라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역사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승리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줄 것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모든 노력과 계획이 무너진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죽은 자는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사라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경험을 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 발버둥을 쳐도, 재주를 부려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안타깝게 죽임당하는 자들을 목도하고, 이들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행동했다.

이들의 죽음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이 바로 교회지도자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가슴이 강퍅해졌다. 오히려 교회지도자들은 피 묻은 손에 기도를 해 주는 잘못을 범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민족의 미래에 대한 절망을 가져다가 주었고,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좌절을 맛보게 했다. 이들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은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큰 능력을 보인 예수님이, 사랑과 진리를 위해서 몸을 내맡긴 예수님이 불의하고 악한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다니 도대체 하나님은 있는 것인가?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세력과, 창과 칼이란 말인가? 그렇게 선하고 의로운 분의 최후가 이렇게까지 참혹할 수 있을까?”라며, 힘없이 걸었다.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들과 함께 걸으며, 제자들을 위로했다.

예수님 부활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약속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은 좌절과 슬픔에 잠긴 인간에게 희망이 되어 다시 찾아오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다. 죽음과 허무에 빠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준다. 죄와 율법에 의해 인간은 죽음과 허무에 빠져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문을 열어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생명과 사랑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까지도 인간에게 내어주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한 예수님에게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과 기아, 강진, 산불, 불의한 정치세력으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보낼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은 인류 모두에게 새 희망으로 다가온다. 미래를 약속한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크라이나 국민, 규모 8.8의 강진으로 고난당하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 갈 것으로 믿는다. 사랑과 생명이 사망권세를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교육받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정신과 신앙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 역사의 현장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 우리도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김종혁 목사)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권순웅 목사)는 산불로 슬픔에 잠긴 국민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두 단체의 산불 피해 국민 위로는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밖에도 한국교회는 각 단체 및 교단, 연합회별, 교회별로 산불로 슬픔에 잠긴 국민들을 위로하는 일에 나섰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벌인 이 같은 사랑실천운동은 무너진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도 가진 것을 나누는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성서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노력이다.

일부 한국교회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걱정만을 주고 있는 교회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자신의 몸과 생명까지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에게 내 주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누어 주다보니 결국 자기 자신까지 나누어 주게 되었다.

몸과 생명까지 나누신 예수님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만나보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위선적이며, 욕심쟁이이다. 바리사이파보다도 간악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회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한다. 말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참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를 맛보야 한다.

이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가. 성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형제들 속에 있다고 교육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상처입고 쓰러진 강도만난 자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우리들 속에 현존하고 계시다. 오늘 예수님은 전쟁과 기아로 고통당하는 사람, 강진과 산불로 슬픔에 잠긴 사람들 속에 피와 눈물 흘리며 십자가에서 조롱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산불과 불의한 정치인들에 의해 고난당하는 국민들 속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또한 한민족의 가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또 강진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 이것이 4월 생명의 계절에 한국교회가 해야 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의 늪에서 벗어나 국민통합과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은 남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념적인 갈등과 분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참여할 수 없다. 미래로 나갈 수도 없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한국교회여! 상처입고 지쳐서 쓰러진 강도만난 자의 모습으로 현존하는 예수님의 평화, 샬롬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로 거듭나자. 그리고 분열과 이념갈등의 중심서 화해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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