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샬롬)를 위해 일하는 교회로

잔인한 6월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6.3 21대 대통령선거도 이재명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분열된 국민통합을 위해서 무엇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며,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줄지를 생각해야 한다. 올해는 분단 80주년, 6.25 동족상잔의 비극 75주년을 맞는 해이다. 남북한 민족 모두는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갈망한다.

전쟁은 남북한 민족 모두를 공멸로 몰아넣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남북한 지도자들은 무기경쟁을 벌이며,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를 외치고, 국민을 갈라치기 하며, 정권유지에 모든 힘을 쏟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북한민족에게 예수님의 평화(샬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예수님의 평화를 노래해야 할 한국교회는 극우화돼 이념갈등을 부추기며, 반 평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남북한 민족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한민족의 화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관념과 이념에 빠진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며,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조성하는데 최전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국민과 교인들이 극우화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이유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윤석열 정부의 남북한 적대적 정책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예수님의 평화의 목소리는 거의 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극우화된 교회를 터부시하기 시작했고, 교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다. 이는 한국교회가 극우화된 결과이다. 일부 목사들의 극우화적인 망언은 전체 한국교회와 목회들을 극우화시켰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분단 상황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남북한 평화와 통일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만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국민통합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 민족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맹방인 대한민국을 패싱하고, 북한 김정은과 직접 대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상황서, 대한민국의 국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21대 조기대통령을 새로 선출해야만 했다. 선거과정서 좌우로 분열된 국민의 이념갈등을 그대로 드러냈다.

조기 대통령선거로 치러진 제21대 대통령 선거는 이재명 당선으로 끝이 났다. 이 대통령은 통합의 정치, 화해의 정치를 선거광정에서 외쳤다. 이제 이 대통령은 정의와 한반도의 평화, 남북한민족의 화해, 자유민주공화국을 지키고, 사랑과 정의로 백성을 섬기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도 가던 길을 멈추고, 새 대통령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국민통합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새 대통령, 한반도평화·한민족화해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새 정부와 함께 국민통합과 한민족 화해위해 일하는 교회로

남북한문제 우리민족 스스로 해결의 길을

남북한은 역사적으로 과거나, 오늘이나, 미국을 비롯한 한반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나라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이들 나라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그래서 남북한의 문제는 남북한 민족 스스로 해결하고, 평화(샬롬)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 민족은 분단 이전부터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땅에서 우리민족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한 번도 경험하지를 못했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됐고, 남북한이 분열됐으며, 정권을 탐하는 자들에 의해서 분단이 고착화됐다. 납북한 정치지도자들은 오히려 분단을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다. 오늘 한반도는 망해가는 이씨조선 말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국민의 이념갈등도, 남북한의 대립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강대국들의 반통일적인 모습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으며, 남북 분단을 악용하기에 바쁘다.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인 민족통일,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민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집권층, 또는 한국교회 내부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남북한의 문제는 국제관계를 비롯한 남북한의 힘의 균형등 역학관계를 분석해서 내려지는 결과이다. 지금까지 남북한의 문제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해 왔다. 때문에 교회와 민이 관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나, 민이 통일문제에 관여하면, ‘국론분열등을 운운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을 철저하게 막았다.

예언자 전통에서 벗어난 교회 역시 남북한의 문제에 관여하지를 못했다.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빨갱이’, ‘간첩등으로 매도하며, 이들을 정치적인 목사로 매도했다. 많은 이들이 군사독재정권아래서 감옥에 갔고, 목회자는 정치목사, 정치적인 교회로 매도됐다. 분단은 이념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고,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

허공을 치는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

이는 남북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사실 보수적인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과제는 선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일과 평화는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위한 기도를 매 예배 때마다 드려 왔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행동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허공을 치는 기도에만 열심을 내 왔다는 반증이다. 한국교회는 한참 북한선교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헌금을 교인들로부터 거두었다. 이 헌금으로 통일 이후 북한교회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스스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의지를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다. 통일 이후 북한에 선교사들이 남한에 이식시킨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북한에 이식시키겠다는 것을 전재로 한 것이 북한선교정책이었다.

얼마 전 진보정부 아래서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에 대해서 침묵했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일제히 전면에 나서 평화를 위한 포럼을 개최하는 등의 모습은 그래도 다행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고, 받아드린 영미의 신학은 한국교회를 자신의 게토에 감금시켜 버렸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한국교회는 이 민족사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 게토에 감금되어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예수님의 평화로부터 유리되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샬롬을 외치기보다도,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 아메리카 팍스를 외치며, 반공주의와 승공주의에 매몰돼, 이념갈등을 부추기에 바빴다. 이는 관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선교개념이 전도라는 개념과 일치시키려는 데서 오류가 발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시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케 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개념으로 착각했다. 선교초기부터 한국교회는 고난당하는 민족의 역사와 유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 한국교회는 통일과 평화, 민족화해의 문제는 다른 누가 할 일이고,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에 가서 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착각해 왔고, 지금도 이 선교정책은 변하지 않고 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북한선교를 한다는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은 성경책을 비닐봉투에 넣어 두만강 변에서 북한을 향해 던지고는 북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고 말하는 해프닝도 발생하고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교회가 새정부와 함께 국민통합과 남북한민족의 화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협력하며,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는 것이다.

집단의식관념 등의 구조악을 청산하자

남북한의 평화를 위한 길, 한국교회의 평화선교는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 있는 남북한 민족이 함께 사는 길이다. 선교는 예수님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고 천당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있는 이웃을 살리는 것이 선교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구원천당’, ‘복음’, ‘성령등 초기한국선교사들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유리시키면서, 전한 싸구려 복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선교는 관념과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구조 악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소외된 자들의 인권회복이다. 하늘은 혼자 가질 수 없다. 이러하듯 하나님의 나라도 혼자갈 수 없다. 특히 남북한의 선교에 있어서, 북한만의 선교, 남한만의 선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민족의 선교는 남북한민족은 물론, 세계 200여 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아니 세계민족을 향한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남북한민족을 비롯한 한민족 모두가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위해서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노래해야 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민족 선교를 위해서 통일문제에 관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북이스라엘 전통과 남 유대 전통 두 주류가 있다. 북이스라엘 전통은 출애굽 이전의 전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북이스라엘 전통은 민에 바탕을 둔 이른바 계약전통이다. 또한 해방전통이다. 가나안 정착 시 부족공동체를 계승하고 있다. 부족동맹의 특징은 왕권이 없는 협의체적 공존체제이다. 왕권이 없다. 중앙집권체제도 아니다. 부족동맹은 신분적 지배자가 없었다.

유사시 카리스마적 인물이 등장해 위기를 타개하면, 평민으로 돌아간다. 상설 군사체제도 없었다. 유사시 모두가 방위체제에 나섰다. 그것은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의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통치를 거부했다. 하나님의 주권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에 두었다. 즉 어떤 제도적인 것이 하나님과 인간, 지휘관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가나안 주변국의 왕권체제 수용을 추진했다. 강력한 지배체제로만 나라가 부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를 반대한 사무엘은 항변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엄한 계시를 선포했다. 사무엘상 811-18절의 말씀은 출애굽 계약전통에 바탕을 둔 부족동맹의 입장을 정리했다. 왕권수립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싫어 배척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을 배신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다. 또 출애굽 전통과 부족동맹정신을 거부했다. 처음 왕으로 추대된 사울까지만 해도 부족동맹의 바탕 위에 있었다.

제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 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사무엘상 811-18)

왕으로 추대된 사울은 전투사령관 이외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통치영역도 분명치 않았다. 다윗 왕이 재위하면서, 왕권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윗은 블레셋의 사령관으로 임명돼 이스라엘과 대결하기도 했고,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북이스라엘을 유대지역에 통합시켰다. 예루살렘 성읍을 빼앗아 개인영지로 만들었다. 그 곳에 거대성전을 건축해 법궤를 가두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등에 업고 통치자로 백성 위해 군림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전통신앙을 빼앗아 감금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어디에도 야웨 신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았다. 외적으로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과 유대가 통일된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남북의 분열을 구체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출애굽 전통에 선 북이스라엘의 신념과 다윗왕조 유대 중심의 체제주의로 갈라놓았다.

유대지방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지방과 그 주민들을 이단시하며, 상대하지 않았다. 갈릴리 일대를 이방인의 땅’, ‘버려진 땅으로 간주했다. 유대 땅의 심장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상징이었다. 그것을 빼앗아 독점함으로써 우위론의 근거가 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그것을 철저하게 악용하며 살았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도, 유대지방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오늘 중동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 역시 서로 다른 전통의 결과이며,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그래서 십자군전쟁이 이후 모든 전쟁은 기독교국가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북한문제 예언자 전통으로 해결해야

이는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국가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무대를 갈릴리로 정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율법과 관념, 집단의식 등 사단과 싸웠다. 한민족에게 있어서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저해하는 관념과 집단으로부터의 해방, 이러한 구조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분열이, 곧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주지해야 한다. 남북한의 분단은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드린 한국교회에 의해서 예견된 것이었다.

한민족의 분열은 민에 의해서 분열되지 않았다. 정권야욕을 가진 집권계층과 강대국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한반도의 분열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정치적 장난의 산물이다. 남북한이 민을 생각하고, 민의 자세를 견지했더라면,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분열을 조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단 80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한민족의 화해란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80년 동안 한민족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큰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군사력과 통치체제 강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은 지난 80년 동안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국민들을 억압해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한 것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은 남북한민족 사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분단 80년이 지난 오늘, 남북한의 평화와 한민족이 화해의 길로 가려는데, 그 길은 멀고 험하다. 곳곳에 장애가 너무나 많다.

민에 의한 통일, 민에 의한 한반도의 평화, 민에 의한 한민족의 화해는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화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도, 이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반통일적이며, 힘에 의한 평화(팍스)를 말한다. 통일과 평화를 말하는 이들을 향해 정치적인 것에 관여 하냐고 말한다. 21대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분단국가에서 사는 한민족은 전쟁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일부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입에서 연일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친다. 남북한은 무기경쟁을 벌이며, 적대적 관계를 조성한다. 북한은 핵실험을 하는 등 남북한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남한 역시 여기에 맞서 무기개발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무기는 끝내는 어디에서인가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군사력에 의한 경제적 출혈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남북한민족이 화해하고, 평화의 길로 간다면, 그것은 오늘날 경제난국 극복의 열쇠가 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갈망해온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 실현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는 새로운 나라를 위한 길로 나서야 한다. 힘에 의한 팍스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버려진 땅, 척박한 땅, 갈릴리지방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실현한 샬롬(평화)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이 길이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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