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것이다. 즉 종교는 인간의 행복과, 부족한 윤리와 도덕성을 완성시켜 주는데 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를 진리를 둘러싼 싸움으로 변질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교파와 교회만이 진리이며, 고등이웃종교와 이웃교단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몰이해하고, 아집과 고집에 빠져 예수님을 교리로 만든 결과이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10WEA 서울총회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이지고 있다. WEA 서울총회 찬반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양측 모두에게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WEA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일부학자와 단체, 목회자들은 WEAWCC와 관련성을 비롯해 종교의 다원주의 등을 내세워,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에 배치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신앙과 신학사상이 다른 이웃교단과 이웃고등종교와의 교류를 단절하자는 말로 들린다. 억지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WEA를 강력히 반대하는 한국기독교총합회는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의 모임인 종교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며, 이들이 말하는 진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종교 간의 신학적, 신앙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최고의 신을 찾는데 몰두했다.

한국장로교가 자랑하는 칼빈이나, 루터, 허버트, 홉즈, 로크 등 중세시대의 평신도 신학자 대부분은 이신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추구하고, 섬기는 최고의 신, 살아계신 한분의 신을 찾았다. 중세교회의 교인들은 과거와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다. 천상을 향한 삶에서 지상적이고, 현실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즉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기도의 세계에서 현실적인 기도와 노동()에 대한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사상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루터의 정통주의 신학에 맞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학을 펼쳤다. 한마디로 신이 지구를 창조한 이후, 시계바늘이 알아서 돌아가듯이,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창조되었다는 예정론을 내놓았다.

성직자, 신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몰입, 교회의 생태계 파괴
종교의 목적
, 인류 모두의 행복, 종교·정치·경제로부터 해방

성직자, 신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몰입

칼빈은 직업(노동)의 중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로가 됐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학을 오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에 부인할 수 없다.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몰두한 나머지 루터의 정통주의 신학은 물론이고, 칼빈의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인 신학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국교회의 질서와 생태계를 무너트리는 잘못에 빠졌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신앙의 다양성,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주장만이 옳고 진리라고 말한다. 이들은 과거에 머물러,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도 부정하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교리와 제도로 만들어 그 뒤에 숨기 바쁜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신앙과 신학이 다른 교단들이 모인 단체와 함께 WEA반대운동을 벌이는 이유도 자신의 신앙과 신학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우월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웃교회, 이웃교단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는 분열과 갈등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오늘 영미의 근본주의 신학과 제국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드린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이는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분열이 예견됐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140년 동안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10월 개최되는 WEA 서울총회 역시 분열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것은 합동측 제109회 총회장 김종혁 목사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총무 모임에서 110회 합동총회가 가장 어려운 총회가 될 것이다고 말한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합동측 제110회 총회는 부총회장 선거에서부터 교단분열의 불씨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는 분명 각자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여러 개의 신학교가 존재함으로써 시작됐고, 지역적 갈등이 불씨가 됐다. WEA반대 목소리는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내세우는 합동측 목회자와 신학자와, WEA 총회가 복음주의적이라며, 찬성 입장을 보이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간에 찬반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또한 이는 한국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평신도 신학자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히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사제(목사)들과 그들의 제의 및 교리 때문이다. 계시종교들은 시간이 경과하면 예외 없이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사제(목사)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며, 세력을 장악한 자들이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갈등, 교회적 갈등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렇게 종교는 역사적 과정에서 항상 진리를 거역하며, 종교를 타락시켜 왔다. 허버트는 이를 종교의 타락원리라고 했다. 그는 또 종교적 진리인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초자연적인 계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공동체가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자, 모든 민족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교적 진술이다고 했다. 이것들은 자연법에 상응하는 것은 물론, 이성적이고 보편타당하다는 것이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보수!보수!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진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허버트의 종교의 타락원리를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성경의 무오만을 외치며,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영미의 근본주의 신학과 제국주의적 신학에 갇힌 결과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그 뒤에 숨기 바쁘다. 그러면서 이단 및 사이비적인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단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세계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교적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기독교는 선교초기 샤머니즘과 짬뽕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어 뿌리를 내렸다. 오늘 일부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경건한 예배보다는 성령을 방매하며, 무당 굿판을 벌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보다도,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종교의 다양성,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피선교국의 특수성과 상황을 몰이해한 결과이다. 선교사들이 선교초기 한국교회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근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내용을 보고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실 근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신학을 진리라고 말하는 보수적인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오늘날 복음보다 강대국을 무서워한다.

이들은 분명 강대국 미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며, 가짜 영적지도자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WEA를 준비하는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목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몰아붙인다. 결국 WEA반대대책위원장이 수습에 나서 이 목사 역시 교단과 한국교회의 귀중한 자산이며, 이단성은 없다고 수습에 나서기는 했지만, 40여명의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목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논쟁은 합동측 제110회 장로교 총회와 10WEA 서울총회가 끝난 다음에도, 끝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 종교·정치·경제로부터의 해방

분명 이 같은 신앙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피선교국의 문화와 전통을 몰각하고, 이들의 예배행위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교적 진술을 거부하는 것으로 모두가 종교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아집에 갇혀 자신만의 신앙이 진리라고 고집을 꺾지 않는 자들은 분열주의자이며, 종교개혁 전통에서 이탈한 자들이다. 영미 선교사들이 만들어 낸 피선교국의 문화와 전통, 종교를 민속 또는 미신으로 치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경제체제하에서 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나머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쟁과 약탈의 신으로 만들어 버린 주역이 됐다. 십자군 전쟁이후 세계 모든 전쟁은 기독교 국가에 의해서 자행됐고 자행되고 있다. 신의 이름으로 일어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은 가자지국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의 목적,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살해하며,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과 함께 인간의 행복에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특정한 교파의 교리가 더 우수하고, 진리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교리상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수 백 개의 교단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고, 줄 것이다. 한국기독교 역시 장로교 300여개의 장로교단과 수 십 개의 교파,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 및 이단까지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분열은 예견하게 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한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보며, 같은 찬송가를 부르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분열과 갈등을 일삼았고, 교회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트리는데 중심에 서 있다. 수 백 개의 교단의 신앙과 신학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고등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허버트를 비롯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종교 간의 관용을 목표로 일하고, 이를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수직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수평적으로는 특정 정치세력, 종교세력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기독교 구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며, 근대적 민주주의에서 추구하는 정치적자유의 뿌리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 한국보수주의자들이 외치는 자유주의의 목표는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적, 정치적 자유는 인간의 경제적 해방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행복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감성적인 인간들의 행복을 돌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헌데 세계교회, 아니 강대국들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을 일으켜 약소국가의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진리를 거역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의 곳곳에서 우리는 그것이 달성하려는 목적에 아주 적합하도록 최고의 기교로 조정된 수단들을 발견한다(중략)그것이 신의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라고 생각하기 쉽다한마디로 모두가 존재하는 것은 신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라는 말이다. 칼빈의 말대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어떤 사람은 영생의 길로 가게 예정되어 있다. 아담 스미스의 말 하나를 더 인용해 보면, “인간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파괴되는데서 온다고 했다.

한마디로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무질서에 빠졌다. 사실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칸트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 리츨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도덕성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이것이 가능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고 했다.

정교분리, 교회 대신 정치권서 문제제기

요즘 기독교를 비롯한 통일교, 신천지 등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개신교 목회자들이 일제와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주창했던 정교분리를 정치권, 특히 여당의원들 사이에서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정치의 분리 위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군사독재 아래서 한국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군사독재정권의 부역자였다는 지적을 받고, 독재정권을 향해 바른 말을 하는 목회자, 예언자전통에서 통일운동을 비롯한 노동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 등 행동하는 목회자들을 향해 정치목사로 매도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한국에 파송된 영미선교사들은 정치적인 행위는 총독부가 맡고, 종교적, 교육적인 일은 교회가 맡는다는 일본식민지세력의 정교분리정책에 호응하며, 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방해했다. 심지어 구약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구약성경 출애굽기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금지했다. 이를 어기는 교인이 있으면, 교회에서 추방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선교사들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교인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이 같은 사실은 선교사들이 본국 선교부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런 선교사와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교회지도자가 된 목사들은 일본이 망해갈 무렵, “신사참배는 국가를 위한 예이며, 배교행위가 아니다고 주장하며,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신사를 참배하는 배교의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해방 후 이승만정권의 최대 부역자 노릇을 했으며,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했고, 군사정권 아래서 피 묻은 손에 기도를 해 주었다.

이렇게 교회지도자들은 배교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교인들에게 이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등의 설교했다. 그래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한국교회는 행동하지 않는 교회라는 비난을 받았고, 이 전통은 오늘날 가짜 영적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이들 중 일부는 세상이 변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잘못된 권력을 옹호하면서, 그 권력을 함께 나누려고 욕심을 부린다.

한마디로 잘못된 정권의 최대 후원자는 한국교회이고, 보수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다. 이렇게 정교분리를 외쳤던 목회자와 교인들은 어디로 가고, 오히려 정치인들이 정교분리법 위반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요즘 문제가 일어나는 곳에는 늘 교회의 목사와 장로, 권사가 끼어 있다는 언론보도는 한국교회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가 성직자와 평신도지도자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이것마저도 분열과 갈등에 익숙한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각자의 목소리가 내며, 자신들의 목소리만이 참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국가종교나, 정교분리 종교보호에 목적

종교는 역사적 과정에서 항상 거역하며, 발전해 왔다. 홉즈는 국가종교’, 로크는 정교분리를 주창했다. 국가종교나, 정교분리는 모두 종교를 보호하자는 목적에서 주창됐다. 홉즈는 종교간의 평화는 자연적, 이성적 원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종교로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했다.(홉즈의 저서 리바이어던) 한마디로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이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국가뿐이라는 것이다.

홉즈는 종교 간의 갈등을 인간의 본성에서 파악했다. 때문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성직자들을 국가기관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간의 갈등과 종교의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해 하나님나라운동에 방해가 되는 오늘날 보수화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일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펼치는 부정선거 음모론은 치유할 수 없는 관념이 되어버렸다. 이는 국민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들은 미국 극우세력과 연대, 우상 강대국 미국에 기대어 문제를 풀려는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들이야 말로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종교가 절실하다. 반면 로크는 홉즈와 정반대로 교파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와 종교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정교분리를 주창했다. 로크는 정교분리를 모토로 미국 캐롤라이나주의 헌법을 제정, 1669년도에 발효했다.

로크는 교회나, 국가가 종교적 관용, 정치적 관용을 게을리 하면, 사회적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종교 활동에 대하여 관용적 자세를 가져야 하며, 종교가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국가가 최소화하여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파 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홉즈나, 로크의 이 같은 주장은 종교를 보호하는데 목적을 두고, 주창됐다. 이들의 주장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홉즈와 로크의 이 같은 사상은 교회의 분열과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며, 국민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한국교회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홉즈와 로크의 주장은 모두 종교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의 행복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인간 모두가 종교, 정치, 경제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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