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목회상담학자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역자 박영민, IVP, 2020)에서 개혁의 장애물을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 전문적 지식과 학문이다. ‘전문가’라는 울타리는 잘못하면 먼 미래와 자정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둘째, 틀에 박힌 사고로 현재에 안주하는 태도다. 미국의 복음주의자 조지 바나(George Barna)의 ‘주전자 속의 개구리’가 적절한 비유다. 원래 개구리는 뜨거운 물에 뛰쳐나가지만 주전자에 미지근한 물을 붓고 개구리를 넣은 다음 서서히 1도씩 올리면 안주하다 죽는다. 익숙함은 위험하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직후 개국공신들은 눈엣가시인 최영 장군과 정몽주를 숙청하자고 왕에게 건의한다. 이때 고려의 권문세족인 이인임은 반대한다. “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 물과 같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되고 종말을 고한다. 권력을 누리려면 정적을 가까이 둬야한다. 비판 세력의 비판을 들어야만 부패하지 않는다.” ‘개혁(改革)’이란 “가죽(革)을 벗긴다”는 뜻이다. 쓰라린 만큼 신선도는 유지된다. 개혁의 성공은 비판받는 능력에 정비례한다.
비판할 때 고려할 것이 있다. 하나, 나의 비판이 옳은가. 둘, 나의 비판에 사랑과 책임성이 있는가. 이게 없으면 정죄에 불과하다. 셋, 나의 비판은 시기가 적절한가. 넷, 비판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면 비판을 멈춰야 한다. 다섯, 비판할 때 예의를 갖추는가. 감정이 아닌 온유와 겸손이 매너다. 한국 사람들은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은사(?)가 있다. 모든 잔소리는 옳다. 그러나 듣는 이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면 모욕이다. 강단 설교도 그렇다.
교회는 네 부류가 있다. 첫째, 유람선 교회다. 친교 위주의 귀족화된 교회다. 좌석을 VIP석, 1등석 등으로 계급화하며 누가 헌금을 많이 내며 누가 힘이 센지를 따진다. 둘째, 전투함 교회다. 세상 혹은 사람들과 싸우는 교회다. 힘과 숫자, 규모로 밀어붙인다. 셋째, 방주 교회다. 자체 유지를 위한 프로그램과 열심 위주다.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구원 받는다는 논리로 세상에는 소극적이다. 넷째, 구조선 교회다. 영혼 구원과 선교, 구제에만 집중한다. 자리싸움도, 귀족화도 없으며 ‘도토리 키재기’와 ‘그들만의 리그’도 보이지 않는다. 21세기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세속화와 인본주의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 목회자와 성도, 교회가 개혁 대상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역할’에만 매달린다. 역할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교회 안의 감투와 직분을 신앙화한다. 역할이 끝나면 신앙도 끝이다. 가짜라는 증거다. 번아웃이 온다. 주일예배를 드리고도 피곤하며 지친다.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인데 노동으로 주일을 채운다.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가짜 사랑은 “만일 ~한다면”의 조건과 “~때문에”의 환경으로 일관한다.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바리새인이다. 외식해서 그렇다.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다. 사람을 의식하는 인정 욕구, 명예욕, 자기 자랑, 인기영합을 말한다. 구약의 요셉은 하나님만 의식하며 “형통한 자”(창 39:2)로 살았다. 형통의 본질적 정의는 만사형통이 아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NIV)
무엇부터 개혁할 것인가. 바로 ‘귀족화’다. 각종 이권과 직분 장사꾼, 권위의식에 찌든 중직자, 돈과 권력의 ‘황제목회자’의 어지러운 역할놀이와 종교 장사는 개혁되어야 할 1순위다. 종(bell)은 ‘울려야’ 종이다. 라면의 본질은 ‘면발’이며 삼성그룹의 핵심 가치는 ‘인재와 기술’이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수 십자가’다. 개혁이란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핵심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세상이 아닌 교회의 부패를 개혁한 창조적 파괴였다. 교회는 세상과 외부세력에 의해서가 아닌 내부의 부패와 타락으로 망한다. 하나님은 ‘역할’이 아닌 ‘본질’을 원하신다. 예수 십자가라는 기독교 본질에 충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솟는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의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서”(In the face of God)가 신앙생활이라면 “사람 앞에서”는 ‘종교생활’이다. 개혁은 ‘코람데오’(Coram Deo)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말이다.
본지 논설위원, 한국교육기획협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