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는 사람과 등진 한국교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예속된 한국교회 역시 타락한 유럽의 중세교회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며,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들의 언어로 복음(기쁜소식=하나님의 참사랑)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 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의 맛을 낼 수 있다. 세상과 등진 교회는 성장할 수 없고,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물질을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나누고, 먹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추수감사절은 1년 동안 햇빛과 물을 주시고, 농사를 지어 수확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이날 일부교회는 지역주민들을 초청해서, 먹을 것을 함께 나누며, 나눔의 공동체를 실현한다. 또 일부교회는 감사절의 헌금 일부, 또는 전체를 삶의 현장에서 밀려난 보잘 것 없는 이웃을 위해서 봉사한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며, 이들의 삶의 현장서 이들의 언어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의 삶의 길을 가는 것이다.

또한 루터나,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천상의 삶 못지않게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부교회들이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와 마찬가지로 천상의 삶만을 강조하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겉옷까지 빼앗으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등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다.

중세 이전까지 교회는 지상의 삶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사제들은 천상의 삶만을 강조했다. 천상의 삶을 위한 면죄증까지 판매했다.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면죄부를 판매했다. 이는 교회를 부채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당시의 경제, 정치, 문화 등 인간의 모든 삶은 종교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와 정치, 나아가 경제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는 더불어 산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더불어 수난 당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길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것이며,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고난 당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의 신앙은 있어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의 신앙은 없다. 심지어 십자가의 신앙을 부정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경제에 예속된 교회 물질중심 감사절서 제의적 감사절로 변해야
세상 사회적 지위와 부로
, 하나님나라 흔적 없는 은총으로 평가

성경, 하나님나라의 빛으로 보고 해석해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보고 해석하지 않는다. 모두가 종교를 권력으로 만들어, 정치·경제 등의 모든 삶을 종교에 예속시켜 버리려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성경에서 일탈해 교주가 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이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범죄행위이며, 교회를 하나님 없는 종교단체로 변질시켰다. 교주화된 어느 목사는 예수님이 모든 죄인을 용서했듯이, 너도 성비위 목회자를 용서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기다릴 수 없다. 예수님이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랐던 천박하고, 버림받은 이웃을 등지고서는 하나님나라는 절대 오지 않는다. 추수감사절 때마다 나누고, 섬기며, 십자가의 신앙을 본받자고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명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며, 사랑의 종교이다. 모두 자기십자가를 지고, 교회의 변혁,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봉사하며,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에 관한 책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해 증언한 책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동하는 믿음이며,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열심히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는데, 기도한 만큼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등지고,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독차지 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는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강대국의 침략으로 고난당하는 이웃나라 백성, 기아로 굶어죽는 아프리카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억압적이고 수탈적인 사회체제나, 정치권에 대한 대립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체제서 오랫동안 신음하던 사람들은 인간의 지배와 통치 아래서는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통치할 때만 아름답고, 행복한 평등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아스라엘 민족은 이에 대한 신념을 갖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이 통치하는 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직접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고 했다. 이들의 이 같은 신념은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결실의 계절, 끈끈한 공동체성 회복해야

인간에 의해 굶주림과 학대로 인해 고난당하던 히브리인들은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를 거부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갈망하며, 실현하려고 한 것은 당연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히브리민족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인격화 해, 파라오와 같이 인간을 억압하고, 학대할 것을 하나님은 아셨다.

그래서 광야 40년 생활의 훈련과정을 통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통치하는 구원의 역사를 직접 교육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천당’, ‘천국’, ‘히나님 나라의 보화등등 천상의 삶만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라고 외친다. 그렇다보니 교인들은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는데 행동하지 않는다. 성령을 방매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장사꾼, 사이비들이 판치는 종교집단이 되었다.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장사꾼들은 모두 사이비 교주와 다르지 않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는 사람,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 등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각하고, 하나님이 받아야 할 열광을 독차지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었다. 섬김의 신앙. 더불어 사는 공동체 신앙, 더불어 고난당하는 신앙을 실종케 했다. 어리석은 사랑,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모두가 욕심쟁이가 되어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등진 결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굶주림이 없는 나라, 먹을 것이 풍족한 나라이다. 히브리민족은 땅 한 평 없는 떠돌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히브리인들을 인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민족의 절실한 갈망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들이 대망한 가나안 땅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 맛있는 음식이 차고 넘치며, 서로 의지하며, 평화롭게 사는 나라였다. 인간에 의해 억압과 핍박을 당하지 않는 평등한 나라이다. 이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갈망이며, 이들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구약성경의 출애굽 사건과 족장들의 이야기는 히브리인들의 해방과, 굶주림과 먹을 것이 풍족한 땅이 중심주제였다.

착취와 억압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굶주림은 죽음보다 절실한 문제였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못이긴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모세는 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라는 것을 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임한 권력을 인격화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결국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출애굽기 163절 말씀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물질은 나누어야 썩지 않는다

물질은 나누지 않고 쌓아두면 썩는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불리 먹도록 해 주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일용할 양식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날 먹을 양식만을 거두어들이고, 그날 모두 먹어치우라고 했다. 헌데 소유욕이 강한 인간은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 종교집단이 되어버린 교회와 세상은 구더기가 들끓고, 음식물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물질은 쌓아두면 변질된다. 그래서 물질은 나누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두를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생활하는 공산사회였다. 성경은 소유의 축적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오늘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은 기아에 노출되어 있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매년 수많은 피조물들이 굶어죽고 있다. 이는 억압과 수탈의 결과이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성경은 잉여농산물을 쌓아두지 말고, 굶주리는 자가 없게 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굶주린 자를 없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와 일용할 양식은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양식의 정의, 나눔의 정의, 섬김의 정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헌데 욕심쟁이가 되어버린 북반부의 인간들은 식량을 무기화해서, 남반부의 백성들을 배고픔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들 나라의 지도자들은 부자나라로부터 돈을 빌려 자신의 아성을 쌓는데 허비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께 받치는 모든 제물은 곡식, , , 염소, 비둘기, 소 등과 같은 양식이었다. 헌데 오늘날 인간에게 이러한 양식보다 금융을 사랑하고, 곡식을 감사의 제물로 드리기보다, 돈으로 감사를 표현한다. 이는 성화된 제의적 감사라고 말할 수 없다. 물질은 나누어여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은 썩게 되어 있다.

구약시대의 장로들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고, 마셨다. 축제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축제인 유월절, 무교절, 추수절, 초막절 등은 모두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이며, 이 축제 기간에는 고기와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추수절과 초막절은 밭의 곡식과 포도의 추수와 관련된 축제이다. 율법은 가난한 자들인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 노비들까지도 함께 즐기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기 1611.14). 신약성경의 예수님과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초대교회 역시 이 전통에 따라 추수감사절을 처음 거둔 곡식과 떡을 놓고, 제의적 감사절을 보내며, 보잘 것 없는 이웃들과 함께 감사절을 지켰다.

이웃주민을 초청해 사랑의 잔치를 열고, 감사절에 들어온 곡식과 햇과일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행사도 가졌다. 추수감사절에 들어온 헌금 전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헌데 이러한 전통이 교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예속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제의적 감사절을 지키는 교회도 찾아보기 힘든 세태가 됐다.

추수감사절을 제의적 감사절로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들과 동일시했다.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교육한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에 대한 믿음, 생명, 굶주림, 올무에 가두는 등 생명을 경시하는데서 온다. 물 한 잔을 대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관계 회복, 생명을 소중하게 하라는 성경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이는 또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이 백성을 보호하지 않은데 따른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가 배어있다.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사유물로 전락시켜, 교인 위에 군림하며, 여성교인을 성노리개로 삼고 있다. 정치지도자들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백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상실했다.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상생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늘 우리사회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성을 상실했다. 대신 서로 갈등하며, 분열하기에 바쁘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물 한잔이 필요하다. 도움을 받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중요하지 않다. 지극히 작은 자는 상대적이다. 나 자신이 작은 자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를 돕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갈 수 없다. 2025년 감사의 계절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아여 한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이며, 그 은총 속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어려운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모두가 잘라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줄 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자는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는 자가 부자이다. 내가 가진 것을 소외된 이웃과 나눌 때, 그 기쁨은 차고 넘친다.

세상은 사회적 지위와 부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흔적 없는 은총으로 평가한다. 사람은 누가 양이고, 염소인지를 구별할 줄을 모른다. 때에 따라 염소, , 늑대로 보인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사람 모두는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로마시대 기독교는 살아남기 위해서 로마가 갖지 않은 힘이 필요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리석은 사랑, 무조건적인 아가페였다.

오늘 세계는 좌우로 갈라져 대치 관계에 있다. 무기경쟁을 벌이면서, 적대적의 관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강대국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핵무기 실험을 경쟁적으로 벌인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고, 통일의 길로 가야 한다. 문제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회가 반통일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는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들이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를 외친 결과이다. 자기 권력을 인격화시킨 결과이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곤궁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섬겼다. 이는 결국 로마의 폭력을 무력화 시켰다. 한국교회 역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구호를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참사랑(복음)을 상실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모두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회피하며, 자신들만 살아남기 위한 카르텔을 종성하기에 바쁘다.

중세나, 고대나, 현대나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만 경쟁을 벌인다. 유럽의 교회들은 타종교로 넘어가거나,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고난당하는 이웃을 등진 한국교회 역시 텅텅 비기 시작했고, 언제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오늘날 교회들끼리의 통폐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이를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교회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등지고, 목회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안긴 힘을 쏟은 결과이다.

영적으로 풍성한 감사절을 보내자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교회, 교회의 역할을 상실했다, 밑바닥의 인간들은 절망하고 있다. 공동체의 끈끈한 연대가 무너졌다. 교회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고, 거대한 교회조직은 이념갈등, 세대갈등, 동서갈등, 노사갈등 등을 부추긴다. 일부지도자는 양의 탈을 쓴 늑대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욕심쟁이가 되어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챈다. 일부 목회자는 교주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는 교회가 됐다. 2025년 감사절을 보내는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주술사노릇을 청산하고,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추수의 계절, 감사의 계절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풍성한 결실을 통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도록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나, 사회서 제도적으로 교인과 국민을 옭아매는 구조 악들을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물질로 풍성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풍성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물질을 영적으로 성화시키는 감사절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자리를 잡고, 돈의 가치가 최고인 시대를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이었다, 성화된 제의적 감사절은 퇴색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추수감사절 헌금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는 교회가 점점 줄어들고, 이웃과 함께 감사절을 보내고 있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25년 추수감사절도 그 어느 때 보다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작은 교회들은 풍성한 감사절을 보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교회는 자생력을 잃어버렸다. 내년도 예산편성, 특히 목회자 생활비도 충당할 수 없는 교회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도 가름하기 조차 힘들다. 도시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농촌교회나, 도시 작은교회는 현상유지도 어렵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작은 교회 대부분이 재정의 상당부분을 추수감사절 헌금에 의존해 왔고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서 추수감사절을 함께 모이고, 나누는 축제의 날로 승화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다 교인들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추수할 수 있도록 햇빛과 바람, 그리고 비를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실종될 수밖에 없다. 영적으로 풍성한 성화된 제의적 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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