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용 길 목사

요즈음 자연의 위세가 대단하다. 염천이란 말 자주 쓰게 되는데 마치 지구라는 솥을 끓여 최고의 온도로 끌어올리는 듯 하여 인간은 그 무한한 위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대세이며 겨우 강변이나 바닷가 혹은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듯 더위를 피하는 정도이며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선풍기나 에어컨 혹은 빙수빙과로 달래는 수준이지 어찌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철저히 여름철에 배우는 수준에 그치고 마는데 이런 우리의 모습은 애처롭기도 하고…. 다만 희망이라면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과 함께 눈앞에 전개되는 오곡백과의 풍요로움에서 지난날 여름철의 혹서의 애환이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심정이다.

산행을 해보면 숲이 주는 혜택은 실로 놀랍다. 그늘이며, 기온을 낮춰서 웬만한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없는 그 신비한 시원함이란 초저녁 숲길을 걸어보면 피부로 느끼는 감이 잘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숲이 있는 길 쪽을 택해서 걷는다. 그때 마치 산비탈을 타고 날 맞으러오는 양 시원한 바람이 내리 쏟아내는 것이 눈으로 감지하지 못해서 겨우 이 정도의 표현이지 반세기 전만해도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오싹함도 배제할 수가 없다. 숲의 기운이 이 정도니 산림녹화의 혜택이 더 놀랍게 지친 현대인에게 많은 기쁨을 주리라 확신한다.

평범한 말 같지만 분명한 것은 높은 산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산행에서 높은 산을 선택한다면 건너는 깊은 골짜기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산행에서 사고를 보면 높은 봉우리 정복에서 오는 사고보다 깊은 골짜기에서 오는 경우가 많고 크다.

여름철 갑자기 내리는 국지성 호우(豪雨)로 불어난 계곡은 그대로 죽음의 골짜기로 변한다.

빗물에 씻겨 흘러 떠내려가는 개미떼 신세를 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깊은 골짜기는 비극적 상황만을 연출 하는가, 아니다. 시원한 물줄기가 바위 사이를 지나 계곡을 적실 때는 많은 피서객들을 유혹하는 매력이 넘치는 골짜기로 변한다. 그리고 높은 산일수록 그 수원은 흘러넘쳐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대로 단비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도 남는 것이 골짜기다. 이런 골짜기를 상상만 해도 가슴에 불어오는 시원함이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나는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통해 사람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사람은 높아지려는 유형으로는 일종의 바벨탑 형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대부분 이러한 유형을 선호하고 그렇게 해야만 높아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높아진다고 하나 그 추락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애써 쌓아놓은 탑이 무너지듯 높아지려고만 하는 인간에게 가장 잔혹하게 그 무너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높아짐의 가장 이상적 성경적 유형은 무엇일까? 낮아짐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낮아짐에 비밀을 움켜쥐고 계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은 낮아지시고 낮아지심으로 가장 높아지신 분이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시고 본을 보여주셨다. 곧 “나는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하시고 대아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다. 높으신 주께서 이렇게 낮은 자의 모습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신 이유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평화공존과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사회 만들기 위한 뜻이 계셨으리라 믿는다.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주님을 찾아와 감사의 고백을 드린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의 예수님 앞에서의 모습을 새롭게 찾아보자. 그는 먼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아마도 코가 땅바닥에 닿았으리라 그리고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고 감사를 고백했을 것이다. 이 모습에서 그는 주님을 가장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셨고 그 권세와 영광 그 능력과 찬송을 받으실 이의 지위를 버리심으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시므로 내가 낮아질 때 상대방은 높아지며 그렇게 낮아진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비밀을 풀어내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주님의 가르침과 실제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다툼을 보여준 상황을 늘 드러내고 있어 민망하다.

자기 자신이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가장 최상의 상황을 보여줄 날이 언제나 돌아올까 생각하며 9월 총회에서의 낯 뜨거운 장면을 다시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신을 옥죄고 있다.

한마음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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