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용 길 목사

어릴 적에 참새를 잡아 구워 먹던 일은 그 맛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뒤뜰에 조그만 대밭이 있었는데, 대밭에 모인 참새들을 한가운데 친 그물 쪽으로 몰아가면 여지없이 그물에 걸려 형들의 손에 잡히면 땅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친 참새의 운명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때는 잡아 구워먹는 재미로 참새가 가엾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하나님이 허락을 받아 참새를 땅에 떨어뜨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때는 웬 참새들이 많았을까? 생각해 보면 짚으로 지붕을 덮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금자리가 많아 그토록 새떼들이 많았을까,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때인지라 자연의 상태가 좋았던 탓이 아니었을까? 아님 뭐라고 해야 할까? 적합한 이유가 안 떠오르는데…. 하여튼 많았다.

참새 이야기는 속담에서 시작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참세가 죽어도 짹 한다' 속담은 많지 않으나 흔히는 입방정 맞은 자의 경우 자학의 의미로 '요 참새주동아리' 라는 말로, 혹은 말 먾은 상대방을 징계의 방법으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참새는 작은 새이기도 하지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새임은 틀림이 없어 점점 그 존재성이 퇴색에 가는데, 마침 유머 시리즈로 등장하여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새롭게 부각된 새라는 데는 실로 주는 교훈이 크다.

1960년대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 부부가 포수의 총에 맞아 떨어지는 순간 "내 몫까지 살아줘요" 1990년대는 "왜 나만 쏴요. 쟤도 쏴요" 2000년대는 이랬다는 것이다. 떨어지는 참새의 말에 살아 전깃줄에 앉아있는 참새는 "쟤 아직 안 죽었어요. 한 방 더 쏴요." 라고 했다니, 단순히 재미로만 들리는 것 같지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왠지 씁쓸한 기분이다.

놀랍게도 성경은 참새를 우리 인간으로 비유한다. 오히려 나은 입장에서 소개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편 기자가 자기 형편에서 참새를 부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내가 밤을 세우니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처량한 모습의 궁핍에 처한 인간 자신의 모습이 분명하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하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시84:3, 102:7, 마10:29)

이스라엘은 지렁이로도 비유하고 있는데, 참새는 양반이지 이렇게 자위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참새는 지렁이 못지않게 연약한 존재임을 지칭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를 참새로 비유할 때 거부감도 있겠으나 마른 막대기, 죽은 개만도 못하다는 비유도 있으니 우리를 참새 혹은 참새왕국 이라고 해도 조금은 여유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오늘의 우리의 형편을 보아 참새왕국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이제 철새의 계절이 돌아왔는데, 여름철새도 있으나 겨울철새의 하늘을 뒤덮을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앉음과 날아감 또한 군무는 대단하다. 혹시 모르나 그 가운데 다친 새들은 잘 나타나지 않으니 그 질서 또한 기이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추위에 떨던 참새들이 아침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떼를 지어 시위를 벌리니 그들의 석연치 않은 행동은 그 지적이 고스라니 우리에게로 향한 것 같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는 속담처럼, 우린 작은 틈새만 발견하면 공격은 여지없이 직사포처럼 퍼붓는다. 무차별 공격, 인정사정 볼 것이 공격한다. 남의 허물이 내 행운이고 남의 행운이 나에겐 저주처럼 들리는 현실이 되고 만다.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 너의 입술로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것을 쉽게 판단치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과 상관없이 아무런 부담가지지 않고 함부로 말한다. 그러나 그 공격을 당한 입장은 벌집처럼 만신창이 되고 많다 심장 가슴 배 말할 것도 없고 머리 얼굴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고 공중분해 되듯 처참한 몰골로 드러나 버린다.

훗날 잠잠해지고 정리가 되면 공격을 당한 입장은 오해로 침소봉대 격이 되어 어이없는 결과를 안고 평생을 얼굴 들지 못하고 살아가도록 한 가혹한 현실 속에 내동댕이처진 자신을 발견한다. 가해자의 입장은 어이없는 결과로 나타난 현실에서도 한마디 반성도 없이 군중심리로 위로 받으며 적반하장의 입지까지 드러낸다면 우린 그대로 참새왕국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도 나아진 것 없이 역사는 이런 비극은 되풀이 된다.

"우리를 누가 참새왕국으로 비하하는 것이요? 어이하여 당신은 국민적 자존심도 버렸오?"
그런데 이런 비난이라면, 역시 우리는 양반이지만 ….

한마음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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