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은 헤라클레스처럼 괴력을 지닌 장수이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블레셋의 목을 비튼 영웅이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모범적이지가 않았다. 부모의 말도 안 듣고, 사람 패죽이기를 예사로 하며 불량배로 살았다. 억센 힘 빼고는 배울 게 없는 자이다. 그럼에도 그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쳐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불량
오는 7월 21일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된다. 지난해 12월 국회가 출석회원 199명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인성교육진흥법’에 의해서다. 이 법은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人性)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각급학교에서 구체적 예산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인성교육을 실시할 것을 의무
여호수아 첫 장을 보면,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을 말하다가 갑자기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수 1:8) 하라고 말한다.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니. 입은 말하고 먹고 감각하는 기관이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감각하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눈에 보이는 삶으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것은 가시성과 불
요즘 날씨는 화사한데, 사람 사는 세상은 밝지가 못하다. 불법비자금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사람이 억울하다며 자살하면서 남긴 메모지에 적힌 이들의 처신이 볼만하다. 하나같이 부패척결을 외치던 살아 있는 권력이어서 그런지 어떻게든 국면을 전환하려는 몸부림은 보기에도 딱하다. 이럴 때 정호승의 시 ‘부러짐에 대하여’ 한 토막으로 우리 현실을 반추해보는 것도
예레미야는 성전 밖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설교했다(렘 7:1-7).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셔라”고 설교했다(요 7:37-44). 목마른 사람은 성소 안에 들어가 제사장이 베푸는 사죄와 축복을 받아야 하거늘,
곤충이나 물고기 혹은 동·식물 가운데 자연의 살벌한 먹이 사슬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 색깔을 수시로 바꾸는 것들이 있다. 열대 우림의 파충류인 카멜레온이 대표적이겠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카멜레온은 역시 사람일 것이다. 사람만큼 자기 모습을 변장시키는 데 능숙한 생명체는 없다. 화장은 가장 초보적인 변장술이다. 교육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공인
장로교 신자라면 대체로 소요리문답 1번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일생동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육적인 몸’으로 사는 모습과 ‘영적인 몸’으로 사는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강일상 목사가 [부활되어야 할 부활]에서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개도 분명 육을 가진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몸’이라고 일컬어지는 생존양태를 가지고 있다. 먹고, 싸고, 자고, 짖고, 으르렁거리다가 물어뜯기도 하는, 그것이 개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사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사는
불의가 일반 현상이 된 곳에서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래야 살 수가 없다. 누군가가 거기서 이탈하려 하면 세상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심문 받으실 때도 그랬다. 모두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사람들은 전염병과 같은 죄악에 오염되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런 험악한 공기 속에서 옳고 그름의 분별은 부질없는 일이다. 무지한 일을
빌라도 법정. 이 세기적인 재판은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를 되풀이해서 성찰하게 한다. 정의는 상처받고, 불의는 활개 치는 세상. 어리석음과 위선과 편견으로 얼룩진 인간사의 표지이다. 몇몇 지도층을 빼놓고, 유대의 민중들이 예수를 미워해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바라바에게 환상을 지닌 나머지 예수를 혐오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저들은 광
바울은 죄악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사망이 왕 노릇”(롬 5:12-17)한다고 한다. 죄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위세를 떨치는 것일까.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강해]에서 죄악에 대해 진술하기를, 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 자신의 피조성을 부정한 것이라고 설파한바 있다. 피조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주가 되고자 함이요, 생명의 고유성
기근을 면키 위해 일단의 식솔을 거느리고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은 뜻밖에도 바로의 선대를 받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바로의 선대에는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다. 요셉이 어떤 인물이기에 그랬을까? 형제들의 악행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대한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눈앞의 출세를 바라지 않고 미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에스겔이 파수꾼으로 부름 받을 때 예루살렘은 “피 흘림의 성읍”(겔 22:2)이었다. 살인, 강탈, 착취, 음행, 불경 등 무법천지였다. 유대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고 혈안이었다. 그런 곳에서 에스겔이 파수꾼의 소명을 받고 망설이고 있을 때 하나님의 경고가 따른다. “만일 네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 간지 70여 년이 흘렀을 때이다. 그 사이 가족을 잃고, 동족을 잃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자나 깨나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귀환 소식에 목매였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인 만큼,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된 사람 또한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리하여 이사야는 “좋은 소식을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 등 세 아들이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여자인 하와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뤘는데, 대홍수사건 이후 노아의 이야기에서는 여자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된 시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라는 기술은 노아가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
어머니가 둘째 아들과 공모해서 눈먼 남편을 속이고 첫째 아들에게 가야할 축복을 가로채 둘째가 취하게 한 사건이 있다. 이삭의 아내요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 이야기다. 리브가는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리브가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모습에서 그녀의 성격을 짐작해본다. 이삭의 결혼 대리인인 아브라함의 시종이 머나먼 메소포타미아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처자가 리브가이
자비하신 주님! 찬바람 뚫고 솟아오른 해 아직은 기쁨일지 고통일지 알 수 없으나 지난해는 슬픈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새해에는 묶은 슬픔들을 말끔히 씻어 주소서 다시는 가슴에 피멍드는 일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지난해는 힘겹게 사는 이들의 절규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미생들’의 생존 현장에서 영
세밑에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의식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젊은이들 대다수가 ‘지금 행복’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지금은 비록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내일이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자
‘갑’의 횡포가 세밑을 우울하게 하는 때에, 야곱과 라반의 고사가 눈에 들어온다. 몸 붙일 데 없는 처지가 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그는 거기서 외삼촌의 양치는 일을 돌보며 온갖 고생 끝에 아내를 맞이하고 자식을 얻고 재산도 불리게 된다. 자수성가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라반은 집안의 큰 일꾼인 야곱을 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굴곡이 깊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사람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새 시대를 열어주신다. 연전에 전국 대학교수들이 ‘방기곡경(旁岐曲逕)’이라는 말을 새해 사자성어로 꼽은 일이 있다. ‘일을 정당하지 않은 그릇된 수단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수년이 지난 오늘의 세태는 어떤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