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살아계신 부모님을 모시고 찾아뵙는데 있어서 매우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주일예배 등을 핑계로 부모님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이 부모를 소홀히 대하는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부모을 학대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아이들이 모처럼 할아버지·할머니 곁이라도 가면 마치 벌레가 옆에 가기라도 하듯, 가로 막는가 하면, 폭언·폭력 등을 일삼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효의 종교’로이다. 그
성경 이사야 43장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의 소설가, 사회비평가인 싱클레어 루이스(1885 ~1951)는 "은 우리 즐거움의 시작이요. 줄거리요. 완성이다"고 말했다. 그렇다. 음악은 영혼의 울림이다 또한 교회 예배의 절대적인 요소가 음악이다 음악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내면의 깊은 아픔과 말 못할 고민을 가사에 실어 고백한다. 그래서 은 곡조가 있는 기도라고 말한다.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는 을 듣고 있노라면, 영혼에 새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기 나는가(?)에 대한 의문이 강하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한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세속화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강하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보다도 돈을 좋아하고, 선을 행하기보다는 악의 구렁텅이 빠져 있는데, 그리스도의 향기를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흔히 말하기를 교회당의 첨탑은 높은데, 교회다운 교회, 교인다운 교인을 찾아 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은 1천3만명이라고 말한다. 이들중 하나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그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그 의 죽음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더라.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대하 32:33) 아멘.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 1822)가 쓴 ‘오지만 디아스’ 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고대 대륙에서의 한 여행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그는 황량한 사막에 몸통은 사라지고 두 다리만, 높게 서 있는 석상의 잔해를 발견했다 석상은 거대한 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도 인간의 탐욕과 무질서가 만들어낸 재앙인 것은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친교를 나누고, 사귄다. 의로운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끼리, 죄인은 죄인끼리, 노예는 노예끼리, 같은 인종끼리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원칙이다. 교회는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성령 안에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합일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겠는가.성서는 처절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목회자들도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과 교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성경에서 이탈한 교회는 세상과 동화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교회간, 교파간, 단체간 갈등을 일으키며,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혼란에 빠진 교회는 모두가 내 교회, 내 교단, 내 단체만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종교개혁 이후 난립한 교파 중심의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개혁 이후 유럽교회는 종파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신도들이 나섰다. 당시 평신도 신학자였던 허버트를 비롯한 아담 스미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등은 초자연적인 진리의 신을 증명하는데 노력했다.한마디로 인간들이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 제왕들이 솟아 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 오는구나/…(중략)…/큰 낙타떼가 너의 땅을 뒤덮고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들이 우글거리리라. 사람들이 스바에서 찾아 오리라. 금과 향료를 싣고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 오리라/케달의 모든 양떼가 너에게로 모여 오리라. 네가 느바욧의 수양들을 제물로 바치게 되리라. 그것들이 나의
미국 텍사스 남침례교 빌리지교회에서 교직주임 목회자인 매트 챈들러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말씀의 시작, 흠 없는 창조의 영광, 그 한복판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음은 한마디로 기쁜 소식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 옛날 성탄절를 생각해 보면, 기쁨과 즐거움은 현대의 성탄절보다 곱절로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데 있다. 말로만이 아니라, 말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노동현장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손길을 기다리는 소외된 사람에게, 분단의 아픔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탄절을 떠나 평소에도 그러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탄절을 맞을 자격이 있다. 지금 고통당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초월적인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성전에 갇혀 버렸다. 분명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면서, 세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을 교주화시킨 유대교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성전화하여, 하나님을 건물 안에 가두어 버렸다. 성전을 절대화 했고, 가진 자, 기득권자,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예루살렘에 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에 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을 만났다. 유대인들에 의해 갇혀
구약시대의 사사는 외적이 침입하면 장수가 되어 적과 싸우고, 백성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재판하는 일을 했다. 사무엘이 늙어 두 아들에게 사사의 자리를 물려줬다. 그러나 이 두 아들은 돈을 받고 재판을 하는 등 신성한 사법제도를 문란케 했다. 이 때 원로들과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애원했다. 이들은 왕을 세워 강력한 나라가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사무엘은 왕에게 집중되는 왕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여호와께서 사무
성경 여호수아 24장은 언약과 갱신을 말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야훼를 택하고 그를 섬기겠다고 한 그 말의 증인은 바로 여러분이오."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여호수아가 말하였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남의 나라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 야훼께 마음을 바치시오."/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다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규정과 법을 주었다./여호수아는 그 모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 존경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정적인 사람이 있다. 존경받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좋은 이미지만을 준다.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른다. 열정도 없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제자로 삼지 않았다. 공자는 열정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한마디로 인간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신뢰를 받을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일본식민지 아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 독립운동
국민들은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 오늘 여야 정치인과 정부 인사들은 국민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머리를 조아린다. 한마디로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망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오늘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할 정치인들의 의중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대해서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 9장 25-27절)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연하게 살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나라에 대통령에게 충성하게 하는 사람만 있으면,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잘못되었어도 칭찬하는 사람만 있다. 이러다가 나라가
사람은 누구나 누구인가의 종이 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갈라시아서 9장에서 율법과 복음의 다른 점을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중략)/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할례나 무
인간은 누가 어떤 것이 양이고, 이떤 것이 염소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늑대도 양의 탈을 쓰고, 군모술수를 부린다. 마지막 날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옥이다. 오늘날 교회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들을 보면,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모두가 맘몬에 취해 한국교회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로인해 하나님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가 혼란한데, 사회는 오죽하겠는가. 오늘날 교회가 국민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교회를 걱정한다. 정치가 국민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정
어느 가난한 목사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 교회 입구 계단에 아침, 저녁으로 침이 하얗게 깔려 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이상하다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다 이웃에 있는 여자중고등학교에서 이탈한 학생들의 소행이었다. 교회 계단 밑 후미진 곳에서 등교 전후 점심때, 하교때,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떼거리로 몰려 와서 담배를 피우고, 가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야단칠 생각을 하다가 여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궁리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렇다보니 세상은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다. 인간 모두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두가 과거를 끄집어내기에 바쁘다. 전 미국 축구 감독이며, 스포츠 분석가인 제임스 존슨(James Johnson, 1943~, 78세)은 "매우 작은 차이가 평범함과 비범함의 을 만든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다르게 창조하셨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얼굴을 마음대로 뜯어 고친다.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 성형한다. 그렇다보니 본래의 모습을 잃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아멘.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작품 ‘노인과 바다’은 끊임없는 도전하며, 인내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성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작품의 주인공은 쿠바의 작은 어촌에서 낚시를 하며 살아가는 노인 ‘산티아고’이다. 그의 곁에는 고기 낚는 기술을 배우는 제자이자 유일한 말동무인 한 소년이 있었다.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