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새 해에 들 때마다 올 한 해에 이것만은 기필코 지켜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하루 이틀 가는 사이에 잊히고 만다. 2014년도의 작심(作心)도 그랬다.요즘 들어 극심한 불경기를 맞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몹시 각박하고, 거칠어지고 있다. 건들면 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듯이 신경들이 날카롭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인간은 연약해서 우리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자들, 즉 원수들을 향해 저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구체적이지 못할지라도 원수들을 향해 복수를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그런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일 것이다. 구약성경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 삼손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힘이 센 장사였다. 그는 나실인이었고,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른다. 또한 주님을 부르며 스스로도 주의 종임을 자인식 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신학과정을 공부하고, 법적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므로 정상적인 주의 종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목양의 현장은 목사님이라고, 주의 종이라고 부름이 그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보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로마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2015년을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당시 로마교회가 그랬듯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때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누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스로 갖는 무거운 짐(?)이 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의 짐이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바른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반듯이 기독교적인 대 사회관? 대 국가관? 대 인생관을 분명히 확립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해
중세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부텐베르크 교회 사제였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독. 1483.11.10. ~ 1546.2.18]가 그 교회 정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는 95가지를 지적하는 글을 게제하면서 시작된 교회개혁운동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개혁교회가 생겨났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 불평하는 습성은 인간의 존재와 그 근원부터 함께 하는 습성인 듯하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이 사람들 참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의 인내와 끊임없는 가르침의 반복을 보게 된다. 늘 불평으로 인생의 업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대하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역사란 단순히 지난 일의 자취를 모아놓은 자료가 아니다. 지난날의 자취를 뒤돌아 살펴보고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바로 세워 나가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그러기에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이 중요하다. 이른바 사관(史觀)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보는 사관에 따라 지난 반세기의 우리 역사가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되기도 한다.
튼튼하게 깊이 박힌 뿌리에서 튼튼하고 잘 뻗은 나무가 자라게 되고, 그런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된다. 나무를 인간사에 비추어 생각하면 종교는 뿌리이고 경제는 줄기이다. 그리고 뿌리 부분인 종교와 줄기와 잎 부분인 경제를 통해 맺는 열매가 행복한 삶이란 이름의 열매일 것이다.영국의 경제학자 마샬(Alfred Marshal)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에 돌아오셔서 가버나움과 나사렛 등에서의 초기사역을 누가복음 4장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가버나움을 거쳐 나사렛 회당에서의 배척과 낭떠러지로 밀어 내려하는 고향사람들, 다시 가버나움회당에서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등, 쉬지 않고 일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 가버나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교회와 세상과 다른 것이 없게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는 비 그리스도인들로 교회 접근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결국 교회와 세상이 같아지면 교회의 필요는 사라지고 말 것을 간과한 결과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고민 중의 하나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그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 때인 BC 605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유다 1차 침공시 포로가 된 선지자로서의 예언사역은 바벨론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다니엘은 유다 왕족 출신으로서 15세가량이었을 때,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가 바사왕 고레스의 포로 귀환칙령이 선포될 때까지(BC605-536) 60여 년 동안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바사의 고레스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의 한국선교역사는 절대빈곤과 나아갈 방향성을 잃은 조선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심고, 전쟁의 극단적 실의와 좌절에 빠져버린 헤아릴 수 없는 영혼을 구원하고, 지금도 1천만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을 품고, 2만5천을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놀라운 은총을 누렸다. 그간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질고의 세월과 풍랑을 해쳐 오면서도 교
모든 사회의 질서는 약속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약속의 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가 새로운 약속을 유발하게 한다. 이것의 구조적이고 공동체적이며 공공복리 적인 형태의 것을 우리는 법률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약속을 지키고 또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기독교의 언약성을 구구히 말하려는 자
인류의 문명은 큰 강(江)을 끼고 발흥하고, 발전하는 역사를 가졌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큰 강을 배경으로 삼아 일어났고, 발전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 문명들은 모두 엄청난 큰 강과 함께 잦은 홍수와 물의 범람으로 인해서 강으로부터 쓸려 내려오는 비옥한 토질을 가진 곳에서 문명이 일어난 특징을 공히 가지고 있다. 고대의 세계적인 4대
튼튼하게 깊이 박힌 뿌리에서 튼튼하고 잘 뻗은 나무가 자라게 되고, 그런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된다. 나무를 인간사에 비추어 생각하면 종교는 뿌리이고, 경제는 줄기이다. 그리고 뿌리인 종교와 줄기와 잎인 경제를 통해 맺는 열매가 행복한 삶이란 이름의 열매이다.영국의 경제학자 마샬(Alfred Marshal)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 누구나, 그리고 어느 때든지 고난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 필연이다. 불치병으로 괴로워하거나 생활고로 탄식할 때도 있다. 의(義)를 행함으로 오히려 조롱과 비난을 받아 고난당할 때도 있다. 고난 중에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극단의 고난도 있다. 우리 인생 중에 예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난에 대하여 그리스
지난 11일 세계에 흩어진 한인기독교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겠다는 취지의 세계한인기독교총연합회(이하 세기총)의 광복 69주년을 맞아 3박4일 여정으로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백두산기도회가 준비되어 함께 다녀왔다. 중국 연태를 거쳐 장백산공항에서 내린 후 버스로 2시간쯤 거리에 있는 이도백하의 한 호텔에 여정을 풀고, 우리 일행은 호텔서 남북통일을 사모하는 마음
구한말 일본제국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을 하려는 것이었다.이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는 등,
감정 속에는 분노(忿怒)라는 감정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사람이 살면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다. 우리의 감정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이 바로 분노라는 화(火)의 마음이다. 이 화(火)는 다스리지 않으면 활활 타올라 나를 삼키기 까지 한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억울할 때에 화가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