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놀라지 마세요 내 부엌에는 물과 불이 있어요 얼음과 숯불과 영하 20도와 영상 20도가 살아요 58도의 독한 술과 13도의 순한 술이 있어요 냉동고에는 치미는 분노와 살인적 치욕이 멈춘 채 정지되고 세상에 새면 안되는 일급비밀이 급냉동되어 무표정하게 굳어 있고 하나의 서랍엔 비상약이 수북하게 약 주인을 향해 위협적으로 수군거리고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밤마다 눈인사를 하고 다섯 개의 칼이 번뜩거리며 용도를 기다리고 한 방이면 돌도 깨어지는 쇠뭉치 방망이가 있고 잘게잘게 찢을 수
봄 비곡우穀雨댁이밭둑에 앉아젖을 물리고 있다보채는봄순이파랗게 옹알이한다요즘처럼 비를 간절히 기다린 적 있던가. 곳곳에 산불이 발생해서 많은 인력이 동원되고 있다. TV를 켜기 전 혹시 오늘도 산불이 났으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이 앞선다.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턱 막힌다. 제발 비가 와야 할텐데... 기도가 절로 나온다. 기후 변화로 봄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 천지가 봄 꽃밭이다. 보기는 참 좋지만 순서대로 피면 얼마나 좋을까. 진달래 피고 나서 개나리 그다음에 목련, 이어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봄나들이 갔다가냉이밭을 만난 엄마호미 대신 자동차 열쇠로 냉이를 캔다열쇠를 땅에 꽂을 때마다지구를 시동거는 것 같다부릉부릉 지구를 몰고 가는 엄마우리는 시속 1,667킬로미터 지구 자동차를 탔다봄의 바깥에서 점점 더 봄의 안쪽으로 다가간다. 조금 있으면 봄의 한창에 머무를 것이다. 들녘에 나가면 쑥과 냉이 등 새순과 새싹들이 고개를 쏘옥 내밀고 있다. 언땅을 뚫고 올라온 생명의 힘이다. 긴 겨울 동안 얼마나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을까. 어둠 속에서 인내하는 생명들의 의지가 경이롭다. 하지만 저들 스스로 혹한을 견딘
늦은 인사살기 어려운 시절 추운 겨울에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지가 많았다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불러아궁이 불을 앞으로 당겨 놓고밥상을 차려 주시곤 했다빈속으로 다니면 더 춥고자녀들에게 밥도 더 갖다 줄 수있다고 하셨다길손이 물 한 그릇 얻어 먹자고 하면쟁반에 받쳐 대접하듯이물을 건네주셨다그때는 몰랐는데어머님의 정성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이복이 되어 오늘을 살아간다어머님, 감사합니다늦게 인사를 올립니다살면서 아무리 되풀이해도 좋은 말이 있다면“감사”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이 말은 사용하면 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에너지를 얻어 놀라운 힘을
움흙 속에 묻어두었던 뿌리가 죽을 힘 다해 움을 틔워낼 때그 움이라는 말맵차던 지난겨울스티로폼 박스에 갈무리 해 놓았던 대파그 하얗고 탱탱한 속살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맵고 아리던 생의 기억 숨긴 채샛노란 새싹 움 틔울 때세상에 대하여 단단히 채비한 게 분명한 게다 움이라는 말볕도 안 드는 음지에 밀쳐두었던 묵은 화분에서 어느 날 노란 대파 줄기 쑥 올라올 때뱃속의 아기가 첫울음으로 문 열어젖히듯 첫 씨앗이 씨방을 찢고 나오듯움이라는 말은 얼마나 힘세든가묵은해를 빨리 버리고 싶었던 걸까여기저기 새해 덕담이 소란스럽다봄의 움은 태양의
입춘 부근앙상한 나뭇가지 끝생바람 지나가는 풍경 차갑다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 침묵의 시간물소리 오그라든 얼음장 밑숨죽인 겨울 적막 깊다참고 더 기다려야 한다는 듯햇살 쏟아지는 한낮지붕 위 헌 눈 녹는 소리 가볍다빈 들판 헛기침하며 건너오는 당신반가워 문 열어보니방금 도착한 편지처럼찬 바람도 봄이다애태울 일 다 지나갔다는 듯새해, 새봄을 맞는 절기가 입춘이다. 이 무렵 남녘 마을에서는 소리 없는 봄 소식으로 붐빈다. 눈 머금은 동백 봉오리의 뺨이 발그스레해진다. 눈밭에서 슬몃 고개 내미는 복수초의 노랑 머리가 반갑기 그지없다. 유난
새해 인사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덤으로 받았지 뭡니까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감사한 일이다. 슬퍼도, 아파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 세상적으로는 긍정의 힘이라고 하겠지만 신실한 믿음을 지닌 사람
새해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오늘의 쓰라림과 괴로움이 아니오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그것은 생활의 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意識은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내 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꿈은 나의 忠直과 一致하여나의 줄기찬 勞動力은 고독을 쫓고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기도는 나의 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연서(戀書)마지막 식사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생오이 고추장 찍어 꾸역꾸역 밥 말아 먹었습니다 마지막 하룻밤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보리차에 스틸녹스 씹으며 아득한 잠 청하였습니다 운 좋게 깨어난 아침이면 마지막 강의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목청껏 푸른 보드마커 잡았습니다 마지막 봉급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두커니 자동입출금기 앞에 서곤 하였습니다 마지막 눈물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실컷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詩)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는 한 줄의 시행(詩行)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마이너스통장에 올무 걸렸던
고슴도치선인장울고 싶을 땐그냥 울어라 내 딸아울음을 너무 참으면네 몸뚱이가 눈물단지로 변한단다네 영혼이 가시방석으로 변한단다내 딸아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라너무 오래울음을 참으면사막과 결혼하게 된단다얼마나 더 견뎌야 잎이 가시로 바뀔까?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선인장이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황량한 사막에서 산다. 거기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초록잎 대신 가시를 선택하는 것이다. 선인장은 온몸에 가시를 잔뜩 품고 있다. 제 몸에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 긴 기다림 끝에 잎이 가시로 바뀌었다. 사람이나
끼 니환한 저녁때였다눈 속에서 눈을 맞고 있었다펑펑 내리는 눈은 아니었고사그락사그락 내리는 눈이었다눈이 쌀밥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시밥 시밥 시밥혼잣말로 시밥이란 단어를 되뇌고 있었다한 끼니가 눈이 부시게거리를 데워 주고 있었다이게 다 밥이야 시야한 알 한 알 잘 익은 밥알들이모락모락 거리의 사람들이눈발을 쐬고 있었다배가 고파 왔고시가 고파 왔으므로이마저 한 끼니의 꿈이었다누가 시인을 꿈꾸는 자라고 했던가. 낮에도 꿈을 꾸는 사람은 밤에만 꿈을 꾸는 사람이 놓칠 수 있는 수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애드가 알렌 포우
꽃은 길을 멈추고만난 적 없는 시인의 부고를 받았다컴퓨터 옆에는 그녀가 남긴 백매도가 펼쳐져 있고나는 햇볕이 떠나간 시간을맨발로 밟고 있는데그 시간 그녀가 죽었다누구는 죽어라 견디고누구는 죽도록 사랑하고누구는 죽음을 껴안고 가던 길을 멈춘다신의 가호가 당도하기 전에사람들은시퍼런 이름을 지운다어제 꽃을 피운 매화 나무가 오늘 꽃잎을 떨구고어제 서 있던 자들이오늘 꽃잎 속에 눕는다떠나는 것에 익숙한아주 잠깐의 우리는살아서 죽고죽어서 산다 꽃들이 떠나간 길가에 산 사람들의 피눈물이 서린 꽃과 편지들이 쌓여 있다. 먹먹하고 답답하고 안타깝
전사의 발바닥언제 갓 태어난 아기의 발바닥을 보았던가희고 매끄러운 탄성,핏줄 환히 들여다보이는 처녀지주름 한 줄 없다그늘 하나 없다울면서 뻗치는 당찬 힘, 저 여린 발바닥 어디에저런 단단한 항의가 서렸는지거친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지녔던지어미의 보호벽을 뚫고 나온어린 전사의 발바닥을 쓰다듬어 본다다섯 개 발가락마다 말간 핏줄거울을 달고지구의 새 역사를 걸으려 하는먼 우주로부터 날아든 별 하나거대한 코끼리 발바닥보다 더 야무지다한 개인사가 가족의 역사가거친 흙을 딛고 일어서는 힘으로파란 핏줄이 선다내뻗는 발힘으로 새 터가 다져진다
줄다리기초여름 밤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목청껏 줄다리를 하고 있다소리로 엮은 새끼줄이 팽팽하다갑자기 왼쪽 논 개구리들의 환호성소리 폭죽을 터뜨린다방금 오른쪽 논의 개구리 소리 줄이 왼쪽으로 기울었나 보다- 시집 『법성포 블루스』에서강명수 시인: 전북대 영어영문과 졸업. 월간문학 등단. 김삼의당 시.서.화 공모대전 대상 수상개구리들 소리를 시각화 내지 감각화 작업으로 그려낸 그림 같은 작품이다. 줄다리기란 삶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늘상 마주하는 현상이다. 인간관계는 줄다리기와 같다. 상거래는 물론 직장의 대부분은 줄다리기와 같다.
당신이 살아 숨쉬어야 할 까닭나팔꽃 새순 돋아 허공에서 길 찾는 거 보셨수?뾰족한 끄트머리가 아침 이슬 어루만지는 거 참 신기하쥬?아직 눈 안 뜬 두 이레 강아지 꼬물거리는 거 보셨수?보드랍고 연하고 따뜻하쥬?당신 손녀딸 애깃적 젖니 돋아나는 거 보셨수?말랑한 얼굴에 하얀 이 돋아 방긋 웃는 거 참 이쁘쥬?그 애기 좀더 커서 벚꽃 잎 하르르 흩어져 떨어지는 거 보면서춤추는 발레리나 같다고 말하는 거 보면 짜릿하쥬?그게 당신이 살아 숨쉬어야 할 까닭이유.자고 깨면 사람들은 전염병 걱정으로 가득 차입 가리고 코 가리고 서로 경계하고 눈
만추여정서리 한줌 녹인 만큼햇살도 한줌만큼 사라지는 가을이다나뭇잎들이 제각각 노을빛으로 치장하고새로 산 시집 책갈피에그 가을 그리움을 저장하고황금빛 들녘은 맨살을 드러내며그렇게 가을은 떠나고 있다떠나가는 그 뒷모습이보는 사람에 따라처연하기도 하고아름답기도 한데늦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내 뒷모습은 무슨 빛깔일까 -『형상 21』 시문학회 엔솔로지 24권에서시속에 나타난 가을이 주는 무수한 이미지, 알곡으로 보면 성숙이기도 하고, 낙엽으로 보면 별리의 다양한 실존의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지막 연에 가서 시각적 감각인 빛깔로 구체적
여행에 대한 짧은 보고서사는 일이 그냥숨 쉬는 일이라는이 낡은 생각의 역사에 방금 도착했다평생이 걸렸다아직도 여전히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간간이 부는 바람이 제법 선선할 때도 있다. 밤에 산책을 나가면 아파트 주변 풀밭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리곤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지열이 올라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가 어느새 숨이 차오르면서 훅- 덥기도 하다. 올 한 해 여행길이 8부 능선을 넘어간다. 연두의 파릇한 새순을 지나고, 아카시아 하얀 향기 흩날리는 초록 잎새를 넘어, 다홍의 능소화 꽃잎들이 흐느
고통의 빛남유리잔이 깨어졌다깨어진 것들이 벽에 부딪히며 빛난다부서진 것들은 때론 송곳이 되어찌르고 아프게 하지만깨어진 아픔들이 모여우리를 다시 빛에 서게 한다- 지은경 한영시선집 『사람아 사랑아』에서* 지은경 시인 : 문학박사. 황진이문학상 대상. 세계평화문화상. 시집 『오랜 침묵 등 13권. 평론집 『의식의 흐름과 그 모순의 해법』 『알고 계십니까』 등. 기행에세이 ; 『인도, 그 명상의 땅』 등 저서 30여 권 시는 은유법(metaphor)을 수사법(rhetoric) 기본으로 한다. 이는 숨겨서 말하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시인의
포옹남극 황제펭귄이 영하 수십 도의 폭풍설을 견디는 것은 포옹의 힘이다그들은 겹겹이 에워싼다수백 수천의 무리가 하나의 덩어리로 끌어안고 뭉친다천천히 끊임없이 회전하며 골고루 포옹의 중심에 들어가도록 한다그 중심은 열기로 더울 정도라고 한다남극 황제펭귄의 포옹은영하 수십 도를 영상 수십도로 끌어올린다포옹을 하지 않고 산지 꽤 오래 되었다. 어쩌면 이 따뜻한 단어를 아예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사람이든 짐승이든 함께 있을 때 가능한 몸짓이다. 한동안 바이러스 공격으로 포옹은커녕 얼굴도 못 본 채 지냈
시계수리공은 시간을 보지 않는다그는 시간의 습성을 찾는 중이다어둠의 부속을 핀셋으로 집어낸다바늘만 보일 뿐대못에 꽂혀 있는 전표 같은 시간멈춰 버린 시계 위찌푸린 불빛을 내려다 보고 있는 부엉이 한 마리불빛 아래 해체되고 있는 상속된시간의 유전자식은 지 오래된 바람은 왜 한 곳으로만 숨어드는지이상한 꿈은 왜 물속에서 젖지 않는지가장 환한 곳에 숨겨진 너를 데려간시간을 열어본다제비꽃이 지는 동안순서를 무시한 채 휘갈긴 신의 낙서인사도 없이 뛰어내린 별과의 약속을모래 위에 옮겨 적고 있었지차가운 불꽃이 부딪치는 별듀얼 타임의 톱니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