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78회 총회장을 역임한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원로)가 12일 오전 숙환(향년 89세)으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30호실에 마련되어 있다. 발인은 16일(수) 오전 고인이 시무했던 광성교회에 들러 교인들과 작별하고, 오전 9시 30분에 한국교회백주년 기념관 대강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葬)으로 치러지며, 경기도 이천 에덴낙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김태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등 1남 2녀가 있다. 한편 고 김창인 목사는 1966년부터 광성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2
올해로 103년째 3.1절을 맞았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영웅들의 삶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우리 예수님 또한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모른 채 세상에서 방황하며 양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의 본문은 요셉의 시대에 새 왕이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압하는 내용이다. 역사와 성경 말씀을 통해 이 땅의 수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교훈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양심과 정의가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우
3.1만세운동 103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오늘 대한민국은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강대국들의 패권다툼이 재현되고 있다. 예상했던 일본의 경제 보복과 역사왜곡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힘을 내세워 우격다짐으로 생떼를 쓴다.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발사와 핵무기 개발로 혼란을 가중하고, 미국은 불난 집에 와서 방위비 더 내라고 겁박한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영미선교사들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기독교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막말을 쏟아내며 국론을
누가복음 3장 10-14절에서, 세례 요한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무리가 반응을 보였다. 요한은 이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의 회개 선포와 촉구도 동일한 맥락에서 선포되었으니,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막 4:12, 눅 24:47). 우리는 회개가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는 방법이자 길이었음을 사도행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행 3:19-20, 5:31, 9:35, 11:18, 21, 17:30, 20:21, 26:18). 요한계시록에서 라
성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교육하고 있다. 보수는 한 나라를 지탱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움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패망하진 74년이 되었지만, 제국주의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일본은 6.25 전쟁이 다시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학수고대하는 나라이다. 그래야만 침체된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보수 역시 이념에 갖혀 눈앞에서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이들은 오늘날 정치
의 ‘그 일(הלאה םירבדה) 후에’는 마치 바로 앞의 브엘세바 언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선 창세기 맥락에서 살펴야하고 다음으로 문법적인 표현을 확인해야 한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이와 같은 표현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곧 장면전환의 전형적인 구문이며 앞뒤를 자연스레 이어준다(창 15:1; 39:7; 40:1; 수 24:29). 과 을 제외하고 우리말 번역은 대부분 ‘그 일 후에’처럼 단수로 옮긴다. 그러니 문자에 의존하는 독자들은 본래 본문의 이해와 다르게 인식한다. 아쉽게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이유로 주님에게서 멀어져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또 그들 중에 더러는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딤후4장 10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으로 간 데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선교지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골 4:14) 그는 아시아의 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바울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갇혔을 때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나 고난을 피해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과 교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독해진다. 고독함을 극복하고, 즐기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런데 고독함을 즐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고독함을 도망칠 이유도 없다. 도망친다고 도망쳐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고독해지고, 슬프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기 때문이다.“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정호승의 시 의 도입부이다. 이 시는 저 유명한 시구.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선언으로 우리 시대의 고독한 생을 대변한다.
자녀(子女)들아 너희 자신(自身)을 지켜 우상(偶像)에서 멀리하라(요일 5:21)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교계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내는데, 그 목소리가 성도, 구원, 교회 등에 목적을 둔 것일까? 정의, 정직, 애린 등의 실현에 목적을 둔 것일까 하는 등의 질문에는 갸우뚱해진다.목사, 장로 등 교계 지도자들은 세상의 최고경영자와는 그 출발점에 대한 이해부터가 다르다. 세상의 CEO는 기업 성장을 통한 경제적인 요건의 충족에 집약된다면,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을 누리는데 그 초점이 있는 자이다. 그러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운동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모습이다. 경제는 선진국에 진입하여 국민의 생활은 이전보다 확연히 달라졌는데 사람들의 심성은 오히려 예전 만 못한 것 같다.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정당의 정치 행위도 구태의연하게 서로 물고 뜯고 비하하고 끌어내리는 수법이 너무 잔인하고 저질스러워 자라나는 세대들이 무엇을 배울까 하는 염려가 앞선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 무엇인가 달라져야 하는데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과거의 정치 상황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국민은 나라의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제자들이 궁금하고, 의심하는 부분들을 물어볼 때마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본문은 길을 가다 마주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해서 주님께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기 자신의 죄입니까?” 이에 주님은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 죄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단편적으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이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생명을 사랑하고, 여성 모두가 어머니가 되는 세상을 열겠다는 마음에서 창업한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소재한 아트테크닉(이사장=양진석 장로, 대표=하인숙 선교사)는 어린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사랑을 느끼며,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똑같은 ‘실리콘 풍선 젖병’을 개발해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양 장로와 하 대표는 엄마의 젖가슴은 생명을 이어주는 밥이라는 철학을 갖고,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풍선 젖병’ 특허를 출현, 분유를 먹이는 과정에서 모유와 같은 온도를 유지시키고 엄
참 생명의 가치와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내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넘어갈 때가 많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함, 오직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 놨는데 우리에게 죄라는 사망의 독이 들어와 악한 것이 내 안에 존재할 때 선한 것은 죽어버리고 악의 가치관에만 움직여 간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우리의 잘못된 틀을 빨리 깨버려야 된다. 아브라함과 가족들이 거처하는 갈대아 우르는 바벨론을 쌓았던 우상의 도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아브라함이 여기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사사기에는 사무엘 포함 14명의 사사들이 등장한다. 왕이 없고 하나님께서 세운 사사들이 통치한 이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죽음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세워지기 직전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까지의 기간이다. 삼갈은 세 번째 등장한 사사이다. 사사들이 활동한 400년은 이스라엘의 암흑기였다. 이스라엘은 영적 리더가 부재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삶을 살았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다른 민족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셔서 노략당하고 괴로움 속에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제와 괴로움 가운데에 돌이켜 용서와
선교 이백여 년이 된 현재 교회의 겉은 일반 대중 종교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으나, 문제는 교회의 내면도 세속 종교처럼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스러운 점이다. 겉은 기독교의 허울을 쓰고 있지만 속이 세상의 기복 신앙을 선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교회의 탄생은 인류의 생명과 영혼을 자신들의 죄악에서 건져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현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원히 죽은 죄인들을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훼손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
약 20여 년 전의 일이다. 노회 목사님들과 ‘백담사’에 들른 일이 있었다. 이때 ‘백담사’ 앞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무더기가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동료 목사는 큼지막한 돌을 들더니 돌무더기를 향해 힘을 다해 던졌다. 그는 말했다. “저런 우상숭배 행위는 무너트려야 한다.” 그때 필자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하고 반문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작금에 '정ㅊㄹ' 의원이 ‘사찰통행세’에 대한 발언으로 “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하며 불교계에 거듭 사과하였다고 한다. 통행세 문제를 ‘봉이 김선달’에 비유
한 아이가 놀이터 철봉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보고 있다. 그 옆에서 다른 아이는 허리를 구부려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거꾸로 풍경을 바라본다. 거꾸로 세워진 집들, 거꾸로 피어있는 꽃들,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 거꾸로 보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왜 그렇게 보고 있니?”철봉에 내달린 아이는 거꾸로 매달린 자세 그대로 대답한다.“재미있잖아요.”사실 재미있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같다. 그래서 아이들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장난치고, 어른들도 노상 뭐 재
사도 바울은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험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는 체험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험이 많으면 구원을 체험하고 고난이 많으면 열매가 많으며, 어려움이 많으면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것, 그것을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18)”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이 악한
객관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내적인 명상이나 묵상으로 혹은 금식이나 고행이나 수행으로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을 체험하려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법론이 아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신체적 물체적 방법론을 채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3장 7절에 보면, 성경에 기록된 바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다”고 되어있다. 이사야 59장 21절에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신다고 되어있는데, 이것도 역시 성령의 유효적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벨탑 사건은 왜 세상의 언어가 각각 다른지 설명한다. 그 전에는 ‘언어’와 ‘말’이 하나여서 상호 알아듣고 의견을 한데로 모았다. 야웨는 사람들이 한 민족이며 동일한 언어를 쓰기 때문이라며 그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흩으신다. 자세히 보면 히브리어 사파(הפשׂ)와 드바림(םירבד)에서 전자만 혼잡하게 되었고 후자는 그대로이다. 더구나 뒤는 복수이고 앞은 단수다.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본문에서 사파는 다섯 차례(1,6,72,9절), 드바림은 단 한 차례 나온다(1절). 그렇다면 사파는 무엇이며 드바림은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