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내와 나는 유대계 크리스천이다. ‘미하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우리는 시내 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인 ‘심해 토라’(글자 그대로의 뜻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이다)를 당해 그를 회당에 데리고 갔다. 율법을 적은 두루마리가 회당 안에 돌려지면 사람들은, 특히 아이들이 그것에 입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나선다. 그 행렬이 우리 가까이에 왔을 때 ‘미하이’가 내게 물었다. “저도 두루마리에 입을 맞춰야 하나요?” ‘네 마음에 달렸다.“ 나는 가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날과 의식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깐 요기를 하고 가자고 하시고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알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땐 주로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보아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숫가락 국물을 떠 먹였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
톨스토이(1828년 9월 9일~1910. 11. 20)는 남 소련(러시아) 툴라 근처의 ‘폴랴나’에서 명문가 백작의 4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절제 된 금욕주의 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는 물론 자기 성찰의 완성을 신조로 삼았다. 그는 사랑의 전령 자로 전 세계인의 복지에 기여 하려는 세계관으로, 1891년 가을 이후 기아 구제 활동에 몰두하였으며,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
이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기독인들 간의 의견이 심하게 충돌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다툼이 심화될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심히 염려된다. 특히 상대가 하는 말이 과연 성경에 부합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등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물론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념, 사상적 사고로 억지를 부리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무속, 사이비, 이단 등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
‘토마스 모어’(Thomas More)를 두고 가히 목숨 바쳐 신앙양심을 실현한 명재상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던 최후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하고 충직한 신하는 영혼과 양심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그는 ‘케더베리’ 대주교구의 성직자 회의가 국왕의 인가 없이는 교회법규를 제정하거나 회의를 소집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성직자의 굴복(Submission of Clergy)문서를 수락한 날, 즉 헨리 8세를 영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맞아들이게 된 날 1532년 5월 16일 국사의 짐
어느 신부님이 강론 속에 나는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그는 숟가락 몽둥이 하나밖에 없드라”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주어도 양복이고 무엇이고 늘어나니 고민입니다. 라고 말하여 장내의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물론 그 웃음은 모두가 흐뭇해하는 평안의 웃음이었으리라 생각하며, 필자 역시 그의 말에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였다.87년 명동성당에 진입하려는 경찰관들을 몸으로 막아 학
작금의 화두는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단연 소통(Communication)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 교회나 교단, 연합회 등은 과연 소통이 잘 되고 있을까?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은 현대의 사람들은 그 성공에 있어서 4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 데서,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돌이켜 보자. 그 첫째는 “나르시스형”은 자기중심적이며 공격적이고 냉정하며 타인은 나를 찬양하기 위해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보며, 자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며, 존경받기만
2024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신년을 맞이할 때마다 교회나 사찰, 또한 산으로 바다로 발걸음이 분주하다. 평소 크게 관심이 없던 이들도 새해를 맞이할 때는 특별한 의미 속에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TV 등에서는 솟아오르는 태양을 행해 손바닥을 비벼대며 연신 허리를 굽혀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삶에 대한 절박함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렇게 애쓰는 것등에 대한 결과에는 보장, 약속됨이 없다. 따라서 “남들이 그러하다고 하더라”또는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자”는 생각에서 여행 길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12월이 되면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들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와 모임등을 볼 수 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종교를 떠나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날이기도 하다. 특히 사랑, 따뜻한 마음 등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용서와 관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고 있다. 예수님 초림 시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눅 2:14
2023년을 정리하다가 약 십여 년 전의 영화 ‘늑대소년’의 한 대목에서 동공이 멈췄다.폐병을 앓는 ‘순’이는 가족과 함께 요양 차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한다. 그들은 예전에 ‘이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죽은 교수의 집에 살게 된다.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마을 식구가 생겨 좋아하지만, ‘순’이는 지저분한 시골 마을 사람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상 거지꼴을 한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먹는 것 외엔 관심이 없다. 그는 흡사 개와 비슷하다. ‘순’이 엄마는 소년을 ‘철수’라 부르
2023년 달력이 한 장 반이 남았다. 한해를 돌아보며 새로 맞이할 2024년의 계획을 세워 보려는데 머리가 멍해진다. 어떤 이들은 “때로는 멍때리는 산책, 침묵” 등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2023년은 종교계가 특히 교회의 정체성에 혼란한 모습을 보이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두드러진 한해가 아니었을까? 그 모든 현상이 교계 지도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데서 멍하니 있기가 왠지 불안하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무기력함이 엄습해 오는 듯하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가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 교회 강단에서도 그에 관한 설교가 심심찮게 쏟아져 나왔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해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들이 무성하고, 날이 갈수록 교계를 향한 돌멩이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사고 있다.어린아이까지 모르는 이 없는 ‘클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를 신대륙 탐험가 ‘콜럼버스’라고 하지만 과연 그를 유명인이라 해야 할까? 영웅이라 해야 할까? 살인마라고 해야 할까? 기독교인 이라 해야 할까? 등 수 많은 말이 회자 되기도 한다.그는 식민지에서 폭정을 펼쳤음을 보여
한 농부가 누군가에게 밀을 심었는지 물었다.농부는 "비가 내리지 않을까 걱정되어 심지 않았소."라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또 물었다. "그럼 당신은 목화를 심었읍니까?"농부는 "벌레가 목화를 다 먹어 치울까봐 심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또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심었읍니까?""아무것도 심지 않았소. 나는 안전을 확보하자는 것이 중요합니다"하고 대답했다.어떠한 위험도 무릅쓰려고 하지 않은 농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ㅊㅈ일보’ 등을 홍보하며 건장한 청장년 등 다수가 보행로 한 켠을 차지하고 세를 과시하는 모습에서 ‘저런 단체 등이 활보하는 세상이 되다니’?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어 가는가? 하는 걱정에서 2011년에 메모해 두었던 내용을 들추어 보니 12년이 지난 작금의 현실보다 미래를 더욱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친구 목사가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 40-50대의 중년의 신사들 셋이 필자의 교회를 찾아 왔다. 처음 대화는 별문제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몇 순(順)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 그
지난 15일은 광복 78돌이었다. 또한 9월 1일은 ‘조선인’ 학살(虐殺)의 만행이 자행(恣行)된 ‘관동대지진’ 100년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그러나 한반도는 남북분단으로 일제의 36년의 만행보다도 동족 간의 대치, 사상, 이념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닌가? 이 비극의 모든 원인이 분명 일제의 침탈에 있음에도 매국노들과 현대의 종일주의(從日主義)자 들의 득세로 또다시 ‘을사늑약’에 의한 일제 36년의 참극이 되풀이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립을 위해 가족, 재물, 목숨 등을 희생한 분들을 잊을
작금에 갑자기 무속(巫俗), 풍수(風水) 명당(明堂)등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데, 명당(明堂)이란 풍수(風水)의 용어가 되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 둘러싸인 요지로 인식되어 왔지만 사실 그 본뜻은 글자 그대로 "밝게 비추는 마루", 즉 임금이 정치한다는 함으로써 "천하를 밝히는 대청마루"일 뿐이다. 지금 말로 하면 대통령의 집무실이 되는 샘이다. 따라서 지금의 묘터나 집터와는 멀어도 한참 멍 이야기다. 본시 왕의 집무실이라면 만인이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법도 한 데 사실은 그렇않았다. 역대의 천자(天子)라고 자처
정수동(정수동 1808-1858)이 어느 시골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 시골 친구는 사는 형편은 넉넉하면서도 워낙 구두쇠라 밤이 되어 캄캄한데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 저녁상이 나왔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정수동이 어둠 속에서 저녁을 먹다 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괘씸한 친구를 좀 골려 줘야겠군"이렇게 작정한 ‘정수동’은 뜨끈뜨끈한 밥 한술을 떠 낼름 친구의 입에 틀어넣었다.시골 친구는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여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정수동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2011년 6월 19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측, 총회장 김삼봉 목사)는 대규모 기도회를 열고 개인은 물론 교회와 교단, 민족의 죄악을 놓고 가슴 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11350여 교회, 약 293만여 명의 성도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장자 교단으로써 2008년부터 “기도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대규모 기도회를 개최하여왔으며, 2012년 교단 설립 100주년을 앞둔 준비행사를 겸하여, 136개 노회 2만여 명의 성도들은 한목소리로 “복 받은 100년, 다음 세대를 세우는 총회, 우리 민족을 고쳐주소서,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라 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의 포성으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진 체로 지금까지도 그 통증에 고통을 받고 있다.그러나 우리의 아픈 현실을 조롱이나 하는듯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나라인 ‘일제’는 또다시 재침략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교과서를 왜곡하면서까지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등 침략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우리나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왜국은 수 많은 침략을 당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또다시 그 망령들의 근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만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며 무엇을 기도하시나요?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받아 누리려고 외쳐 기도하면서도 그 권능을 감당할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보셨나요?그래서 말인데요!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개고생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셨나요?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사도, 제자 등 초대교회 수많은 성도는 견디기 힘든 박해, 핍박, 고난, 고독, 나아가 순교(殉敎)를 했습니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개고생 한다”는 말을 틀리다 할 수는 없지요? 물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이보다 더한 은혜(恩惠)와 평강(平康)과 영광(榮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