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오지 못한 것은 하나는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과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은 싫어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단은 오늘날 다양한 집회와 유튜버와 같은 인터넷 방송 등을 통해 잘못된 복음을 접하게 하고 믿음을 혼란케 합니다. 가짜라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였습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이단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조금 더 더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냐는 물음에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 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안에 거짓 일꾼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거짓 일꾼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도 크게 보아 두 가지 거짓 열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 또는 일꾼이요, 하나는 거짓 고백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은 이리(마7:15)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진실한 선지자들만큼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도 역시 진정한 일꾼보다 거짓 일
사람이 생애에서 가장 솔직할 때는 단 두 번, 즉 태어났을 때와 죽을 때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식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자신만의 움막을 지어 숨어 살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죽기 전에 원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는 순간에 하는 마지막 유언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최고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죽기 직전의 말인 것입니다. 불교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성철 스님은 참 대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 식사가 한 수저 삶은 콩 몇 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위해 변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4:16)”좋을 때는 따르는 사람도 많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막상 재판장 앞에 섰을 때는 아무도 곁에 없다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서글픔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반드시 혼자 가야할 곳, 아무도 따라와 줄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수술실 바로 앞까지는 가족들이 따라오지만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의 끝부분에 이르러 디모데를 세상에 두고 떠나면서 그가 맞게 될 험난한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꾼으로서 그의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1-2)” 여기서 “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비 되면 너희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도 새나 물고기를 살 때 새장을 만들고 어항을 준비합니다. 그것이 살아갈 환경을 준비해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위한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의 정원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
우리는 지금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들이 범람하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셨을 때에도 이단들은 존재하였고,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에도 사단은 그곳에 가라지를 심어왔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말씀 안에 잘 순종하고 있었는데, 거짓교사들이 나타나서 순수한 복음을 혼잡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참다운 진리를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한 돈 많은 부자가 제게 와서 “노년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60세가 되면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노년이 보장되기를 원합니다. 노년에 접어드는 사람들이 어떤 보험을 들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노년의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년이 아닌 우리의 영원에 대한 보장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서 생겨난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7)”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수고는 모두 스스로 자처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된 이유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롬 1:23).그러나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생
교회 안에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히브리인인 것,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 이스라엘 사람 중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들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지역차이와 빈부차이가 있고 지식차이로 인한 차별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그 안에서 빈부차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메시아가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부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하나님만 사랑하시도록 그냥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우리도 표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죄악 된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첫째 보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리고 착한 행실을 가지는 것
세상 사람들은 남들보다 잘 먹고 더 많이 가지고 잘 살기에 바쁩니다. 우리 역시 돈을 더 많이 모아 좋은 집을 사고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노년에 고생을 덜하고 편히 살게 될 것을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영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의 심판으로 인하여 불 못에 가는 운명을 생각하
사람들은 먹는 재미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식당을 알고 그것을 먹는 일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순간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 음식이요 내 뜻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육체가 바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나서도 넘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육의 소욕이 적어지는 것뿐이지 육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가운데 괴로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옛이야기를 할 때 고생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어려서 나무 베고, 풀 베는 등 고생한 이야기, 군대에서 고생한 이야기 등을 하지, 즐거운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시편 90편 10절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자랑이 ‘얼마
죽음이 가까이에 와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죄에서 해방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죄에서 해방받기 위해 많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의 고민 역시 그들이 말하는 108 번뇌에서 해방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번뇌의 근원이 욕심이며 그러한 것
새해를 시작할 즈음에 하나님 앞에 보다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서원하고 약속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해가 끝나갈 즈음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너무 쉽게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는데 있습니다. 신명기 23장 11절 말씀에는 “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지만 믿음의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된 곳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실상"은 실체화"라는 의미인데, 실체화란 본질을 깨닫게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처럼 파릇한 새싹들이나 아름다운 봄 꽃 등을 시각의 능력이 그것들을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