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와 감사의 계절에 감사를 일상화함으로 평화와 화합과 기쁨이 넘치는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소망한다. 일본의 신학자인 내촌감삼은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다”(고전13:13)라고 하였는데 이에 필히 하나를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이는 ‘감사’라고 하였다. 단테가 쓴 신곡 지옥편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지옥 중에서 제일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감사할 줄 모르는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들이라고 하였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효자가 되고, 조국에 감사하는 백성이 애국자가 되고, 하나님께 감사
자녀를 온유하게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도록 훈육하는 것입니다. 온유란 따스하고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온유를 유약하고 비겁하게 보는 것은 편견입니다. 특히, 우리의 부모들은 남의 온유함은 좋지만, 나의 자녀의 온유함은 싫어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유약한 느낌의 온유한 성격으로는 손해를 보는 패배자가 될 수 있어서, 부모들은 자녀를 어릴 때부터 강인하게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각은 남에게 지는 인생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거짓말,
1930년대 미국의 경제 공황기에 나온 이야기이다.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오갈 데가 없어 일자리를 찾아 이리 저리로 다니다가 한 사설 동물원 주인를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동물원 주인은 그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약속을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밥을 주겠다.’그는 주인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서‘주인께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주인은 그에게 약속을 받고 그를 데리고 창고로 가서 원숭이 탈을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쓰고 원숭이 우리로 가서 마음껏 놀기만 하면
우리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된다는 것은 마귀가 다른 씨를 심었기 때문인데 마귀가 다른 씨를 심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가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잘못된 교훈을 배우면 모두 가라지가 된다는 것이다. 좋은 씨를 심어서 좋은 씨가 됐어도 알곡이 채워지지 않으면 쭉정이가 되고, 잘못된 교훈을 받아서 잘못되게 깨닫게 되면 가라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쭉정이나 가라지나 모두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아무 곳에가 가서 아무 교훈을 받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가라지가 되고 쭉정이가 되
사람은 누구나 편견을 갖고 산다. 편견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사회가 그 만큼 불공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장애우들이 자유로운 이동권을 주장하며, 지하철역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본다. 일부 시민들은 장애우들의 이런 행동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이들이 상처받을 말도 서슴치 않고 내 뱉는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이다. 이들의 이동권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5장21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국민들은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 오늘 여야 정치인과 정부 인사들은 국민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머리를 조아린다. 한마디로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망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오늘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할 정치인들의 의중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대해서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바이러스 ‘코로나19’와 ‘코로나19’를 방역하는 정부의 대책이 우리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바꿨다. 교회의 예배 형식까지도 훈수를 하고, 신학자거나 대형교회 목사 그리고 교회 지도자라는 몇몇의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온라인예배’라는 생소한 형태가 당연한 듯이 바꾸어 놓았다. 이로 ‘주일성수’의 신앙개념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시켜버렸다.이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주일을 성수하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 그리스도인처럼 여겨지는 왜곡의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러다가 온라인예배가 고착화 되는 것이 아닌가 크게 두려워한다.‘예배당 없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는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을 불러 능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하는 것이 있으므로 아무리 원수가 많은 세상에서도 대종교를 이룬 것이다. 생명의 종교라는 것은 사람을 능하게 만들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니 능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충성되이 보시므로(12), 사도 바울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의 하나이었으나 주님이 보실 때 충성된 사람인 것을 아시고 불렀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없고 다 죄인이지만
당신이 살아 숨쉬어야 할 까닭나팔꽃 새순 돋아 허공에서 길 찾는 거 보셨수?뾰족한 끄트머리가 아침 이슬 어루만지는 거 참 신기하쥬?아직 눈 안 뜬 두 이레 강아지 꼬물거리는 거 보셨수?보드랍고 연하고 따뜻하쥬?당신 손녀딸 애깃적 젖니 돋아나는 거 보셨수?말랑한 얼굴에 하얀 이 돋아 방긋 웃는 거 참 이쁘쥬?그 애기 좀더 커서 벚꽃 잎 하르르 흩어져 떨어지는 거 보면서춤추는 발레리나 같다고 말하는 거 보면 짜릿하쥬?그게 당신이 살아 숨쉬어야 할 까닭이유.자고 깨면 사람들은 전염병 걱정으로 가득 차입 가리고 코 가리고 서로 경계하고 눈
성경 로마서 12장 4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예술가이며, 시인이고, 작가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 1931)는 “당신이 당신 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주는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줄 때이다”고 했다. 그는 ‘산 골짜기의 요정’, ‘눈물과 미소’, ‘광인’ 등의 작품을 남겼다. 어느 마을에 삼 형제가 살았다. 이들은 각각 진귀한 물건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먼
영국 비평가이며 역사가였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 ~1881)은 “가장 큰 잘못은 아무 잘못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고 했다. 경험론철학과 공리주의에 도전한 그는 또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 형식, 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경 잠언 11장 9절에는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知識)으로 말미암아 구원 을 얻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겨우 22살, 법조인을 꿈꾸던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복무를 수
2022년 장로교 가을 정기총회도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여파로 다소 소극적으로 치러졌던 최근 1~2년 사이의 총회보다, 이번 총회는 적극적이며 활발하게 진행됐다. 모처럼 정식대로(?) 열린 총회에서 각 교단은 저마다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안건들을 다루며, 교단의 새로운 회기를 이끌어갈 임원을 선출하는 등 깨어있는 총회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제 이 흐름을 멈추지 말고, 이 기세 그대로 쭉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솔직히 작금의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코로나19가 가져온 피해를 직격탄으로 맞은 한국교회다. 코로나19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이 반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어 매우 우려된다. 이 드라마는 남미의 수리남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한 작품인데, 그 내용에 있어 반기독교적 정서를 물씬 담고 있다. 이를테면 드라마의 등장인물을 ‘목사’로 표현하고, 그가 교회당에서 설교하고, 성찬식 포도주에 몰래 마약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마약중독자로 만들어 헌금을 갈취한다든지, 여신도들에게 마약을 삼켜 운반책으로 이용한다든지, 겉으로는 목사(?)인데 돈이라면 마약밀매,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모티브가
고대 교부 시대의 자연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신국론》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천지창조를 시공간과 질서의 창조로 인식했기에 이전의 교부들에 비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에 집중하였다(11.5). 물론 그의 자연 이해는 단순하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편으로, 그는 자연과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사명을 다한 후 버려진다고 생각했다(3.10.9).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선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을 사용하거나 개발할 수
오늘날 기후 위기는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착취를 정당화하였던 산업 사회의 논리가 불러온 비극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이해는 기후 위기 시대의 도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반드시 정립해야 한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두 개의 기본적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셨다(창 1:1). 둘째, 자연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있다(느 9:6).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이해의 틀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기독
추석 연휴가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장로교 총회 시즌이 도래했다.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107회 총회를 여는 예장 합동을 비롯해 통합, 백석, 고신 등 장로교 주요 교단이 이 주간에 총회를 개최해 주요 현안을 처리하게 된다.이번 장로교 9월 총회는 정부의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거리두기가 해제된 후 처음 여는 총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각 교단은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비대면 또는 일정을 하루나 이틀로 단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이런 제한이 모두 풀리면서 교단마다 총회를 개회해 새로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 22)바울의 말과 같이 지금 지구의 모든 피조물은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 지난 3월 중순 북극 지역 기온이 평년보다 30도나 올라 영상권까지 치솟았고, 남극도 일부 지역에서는 평년보다 40도나 높은 기온이 관측됐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남극과 북극 한 곳에서의 기온 상승은 경고에 그치지만 두 극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기온 상승은 기후 재앙과 같은 모습을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일례로 지난 3월 인도 델리와 파키스탄 신드주 자코바바드에서는 기
성직자가 타락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목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을 성 프랜시스는 성직자가 기도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며 육체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파했다.예수님의 삶은 기도하시는 삶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쫓아 섬기고자 헌신한 우리 목사들은 기도를 게을리 한다. 사실 목사들이 기도할 시간과 여유가 없을 만큼 너무 바쁘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눅 22:39~46) 그런데 우리 성직자들, 목사들은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습관에 따라 TV 보고, 오락하고, 잡담에 어울린다. 그런 나날이
최근에 분당지역의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도보로 그 교회로 가던 중에 A교회 전도대원이 나에게 전도용 물티슈를 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우리 교회 나오세요, 우리 목사님 설교 너무 너무 잘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세요. 인물도 너무 잘 생기셨어요. 우리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넓은 주차장도 사고 교회 오케스트라도 구성되었는데 너무 너무 잘해요!” 이 전도대원의 교회홍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목사를 자랑하라고 세워진 공동체가 아닌데...사실 목사들 중에는 일반 성도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 9장 25-27절)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연하게 살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나라에 대통령에게 충성하게 하는 사람만 있으면,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잘못되었어도 칭찬하는 사람만 있다. 이러다가 나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