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샬롬교회 담임 정진성 목사가 사순절, 생명의 계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적십자병원에 성금 1천만 원을 전달했다. 정 목사는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의 폭증으로 인해 치료받아야 할 불우한 환우들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을 위해 사비를 털어 쾌척했다.이에 대한적십자사(회장=최희영)는 지난 31일 정 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포장증을 전달했다. 또한 정 목사는 이 자리에서 매년 1천만 원의 후원비를 약속했다. 무엇보다도 사순절, 생명의 계절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과학자들은 눈물에 대해서 약간의 염분을 지니고 있는 수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눈물은 심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눈물은 눈에서 나지만 근원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사정을 가지고 있을 때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면 본문에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사정을 가지고 흘리셨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시대적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영역에서 부패한 암흑의 시대였다. 암흑과 부패의 상황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롯궁에 가시지 않고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이 모여 율법으로 예배한 성전에 찾아가신다. 문제
매년 순서에 따라 사순절(40일)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쳇바퀴 돌 듯이 순서에 따라오며 웬만한 기독교 계통은 왁자지껄 행사를 치르느라 분주하다. 사실 성경에는 부활절기를 중심으로 오는 여러 행사에 대한 연월일시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떻게 보면 신앙과는 무관하게 날자가 다가오니 그날 들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 같은 모양새다. 사실 교회력이란? 종교개혁 전 천주교에서 제정하여 교회 운영을 위한 제도를 개신교에서 몇몇 교단들이 차용해 사용한 후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모든 교파와 교단에서 사용하면서 마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
에스겔이 활동을 하던 시대는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역사 속에서 그 국가적 형태를 잃어버리는 비운의 시기였다. 70년에 걸친 포로 시기의 선지자로 30살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상을 보여주며 그를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현 영적상태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의 마음에 강하게 임하여 백성들을 향해 들끓는 심정으로 대언 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는 골짜기의 환상을 통해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마른 뼈와 같이 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생명의 근원인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영혼이
2012년 3월에 메모한 것이다. 경향신문의 ‘유인경’ 기자는 가장 중요한 태도를 요즘 유행하는 S라인의 S에서 찾아본다며, Sorry, Simple, Surprise, Sweet, 을 말한다. 그중 첫 번째 S는 Sorry입니다. 쿨하게 사과 하십시오.”라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말 떼면 아기들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미안하다는 말을 정말 안 합니다. 지하철에서 제 발을 밟고도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댁 발이 왜 내 발밑에 깔렸냐 하는 시선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형법, 헌법보다 무서운 것이 국민정서입니다. 국민정
인간은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포기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날개를 크게 다친 독수리 한 마리가 벼랑 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몇 번이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다친 날개로는 도저히 하늘 높이 날 수가 없었다.“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거야”그는 날기를 포기하고 지난 날 생각을 했다. 태어나자마자 형제들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넌 위대한 독수리가 될 자격이 있다.”형제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생략)/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기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목숨을 내어주기를 힘듭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장기를 줄 수 있겠지만 자식이나 동기간들은 조금 다릅니다. 손가락을 문에 조금 찧어도 아픈데 주님은 이 모든 고통을 다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갚아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믿기 전의 방탕한 삶을 계속 살아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구약에서 등잔대, 메노라는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6 책에 35차례 언급된다. 출애굽기는 성막건축 에 관련하여 언약궤를 비롯한 등잔대의 재료와 모양 등 제작방식에 대하여 세밀하게 묘사한다(출 25:31-39). 아쉽게도 정작 등잔대의 크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한편 열왕기상에서 등잔대는 솔로몬 성전에 배치된 상황에서 소개된다. 즉 성막의 성소에 배치된 등잔대는 하나뿐인데 솔로몬 성전에는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 개씩 등잔대 10개가 놓였다고 보도한다(왕상 7:49). 솔로몬 성전이 성막보다 넓은 공간 때문에 하나의 등잔대로는 충분히
오직 성경만을 따르는 신앙을 형성하고자 했던 노력은 16세기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핵심 내용이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서도 말씀 선포자들의 수고와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서 심령에 복음이 메아리치게 하였다. 이런 집중적인 성경공부는 1901년부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각 지역교회에서 가르치고, 중요도시에서 연합해서 학습하다가, 노회 주최로 모였다. 새뮤얼 모펫 선교사를 필두로 이런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였으며, 솔라투 선교사는 한국교회 선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바로 성경에 기초한 저녁 사경회라고 지적하였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류길자 목사(민영교회 당회장·민영기도원 원장)가 산수(傘壽)를 맞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온 80년을 정리한 첫 번째 자서전 『행복한 여자』에 이어, 두 번째 자서전 『아주, 행복한 여자!』(기독교한국신문 출판국, 330페이지, 비매품)를 내놓았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이후 류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 앞에, 예수 앞에 바로서자, 말씀에 따라 살자. 이것은 인생의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복을 받고 이름이 창대케 되는 비결이 될 것이다”고 외쳤다. 『아주, 행복한 여자!』는 류 목사의 80년 삶, 믿음의 삶을 총 정리한 피와 땀, 그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많이 부른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에 나의 육체를 낳아준 아버지,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있다. 이 땅에서 내 육신의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히 다르다. 육신의 아버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를 땅에 놓으시고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누가복음 11장 13절에 “악한 아버지”가 나오는데, 이 땅의 아버지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악한 아버지는 자녀에게 무능하고, 무지하고, 부정적인 것을 알려주는 아버지가 악한 아버지
항간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 구약과 신약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난무하여 아예 경전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의 정체성도 함께 도마 위에 올려 진위에 대한 논쟁을 유도하는 저서들이 등장하는 중이다. 성경의 진리에 대한 진위의 논쟁은 기독교의 뿌리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므로 누구나 함부로 재단하거나 결론을 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닌데도 염려스럽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에서의 이주, 바벨론 유수 이후의 강제 이주와 서기 70년의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멸망과 강제 추방등등
성경에는 아말렉과 전쟁한 사울 왕이 양과 소와 살진 것의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노획물로 가져오며, 모든 백성은 진멸했으나 아각 왕을 산 채로 잡아온 사건이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이 고대 로마에서도 있었다.고대 로마인은 전쟁에서 잡은 적국의 왕후나 장군들을 매우 융숭하게 대접했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향유로 몸을 닦아주고 비싼 옷을 입히며 더할 수 없이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이다.그러나 사람이 좋아서 그랬던 것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다만 승리의 나팔을 불고 개선할 때 전리품인
잘 돌아가던 컴퓨터용 프린터가 고장이 났다. 사용 설명서를 꺼내놓고 이게 잘못됐나, 저게 잘못됐나, 하나하나 점검했다. 결국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했다. 수리하는 사람이 와서 들여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코드를 안 꽂으셨네요”황당한 경우이다. 이런 일도 있나 싶다. 하지만 이토록 기가 막힌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 삶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기계가 고장 났을 때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뒤엉키면 좀처럼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이 매듭 저 매듭에 손을 대보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사익을 위해서 악용해서는 안된다. 오늘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사익, 돈을 벌어드리는데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는 ‘성령’을 방매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악령을 받아드려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 대신 맘몬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박수올을 닮아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죄악을 질타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복을 받으라는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둘은 대조적인 상황이나 예를 보여줍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 두 관원장 중 하나는 석방되고 다른 하나는 죽습니다(창 40:2). 이스라엘의 두 마음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입니다(호 10:2). 예수님의 양쪽에 십자가형을 받던 두 행악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눅 23:39-43). 오늘 본문은 속죄일에 드린 제의에 등장한 두 염소를 언급합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여호와께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것입니다(레 14:4 참조). 속죄
마라톤 경기를 보면 수백 명이 출발하지만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고대의 마라톤 선수들은 경주를 할 때 옷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경주를 하는데 방해
윌리엄 블레어 (William N. Blair)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읽고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들이라고 하는 설교를 하고 난 다음부터 부흥회의 불길이 피어 올랐다. 교회 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확실히 성령의 임재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갖게 있었다. 감격과 격정 가운데서 그들을 밀어올려내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며칠 간 충만하게 젖어들었다. 그 감동의 격류는 통성기도와 통회의 울음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마치 영혼의 찬양처럼 들렸다. 다시 상술하자면, 1월 12일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블레어(Blair)
우리는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입술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밥 먹을 때, 잠들기 전에, 예배 시간에도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교제를 하였는지 묻는다면 확실하게 예! 라고 자신감 있게 대답할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사순절 기간 의무감으로 주님을 찾는 자가 되지 말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말씀과 실천적인 부분을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덕스러운 신앙을 가졌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전날 밤 성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고별사적인 말씀과 당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