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는 일을 성공한 지도자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름에 33번의 전투를 완승으로 끝낸 지도자이기에 그를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어떤 것인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대하여 여호수아서 1장에서 5가지를 일러 준다.여호와께서 새 시대의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러나 디모데전서 2:1은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즉 나라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우리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비판이나 비난에는 어둠이 그렇듯이 다른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
“단정(端整)”이란 사람과의 관계.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질서 있는 삶의 모습을 성경은 ‘단정하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이웃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고요하고도 평안한 삶의 정황이 필요하다.국가지도자를 위한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는 중에 왜 “경건”과 “단정(端整)”을 말씀하는가.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 즉 정치지
우리 한국인의 의식의 저변에는 정치는 매우 더럽거나 추한 것이고,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만 사고하면 우리의 삶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는 결국 누가 책임져야 할까.한국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정치 참여에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특별히 복음주의의 교회의 전통에서는 더욱더
최근의 경기도 도의회가 결의한 성 평등조례, 군대 폭행사망사건과 지휘관의 여성장교성폭행 사건, 그리고 사리에 밝아 이 시대와 부조리를 청량음료처럼 냉철하게 지적하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던 법무부장관의 부인과 딸 그리고 기득권자의 부패함 등은 ‘국격(國格)’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렵게 한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자살률, 이혼율, 그리고 교통사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항구의 바다 쪽 가로등 위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는 갈매기의 표정은 너무 쓸쓸하기만 하다.고기잡이 어선을 따라 갔다가 항구를 향해 돌아오는 갈매기의 날갯짓과 울음소리가 내 마음 탓인지 쓸쓸해 보인다. 등대가 있는 방파제의 낚시꾼들이 던져주는 고기를 받아먹고, 항구의 바다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의 날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마 11:28)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부르신 것일까 아니면 부자들을 부르신 것일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부한 자들에게도 있다. 가난은 참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이다.김동호 목사는 그의 책 ‘깨끗한 부자
미국과 유럽에서 노예해방이 되고난 뒤에도 노예였던 사람들이 여전히 노예처럼 살았다고 전한다. 우리네도 사실 그랬다. 종으로 살던 사람이 세상이 변하여 종의 신분을 벗었으나 옛 주인을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주인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그 집의 아랫것으로 살았다. 과거 노예(아랫것)생활에 익숙해 있고,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또 자유가 오히려 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를 로마서 6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산자답게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크게 공헌된 것 중의 하나가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민족에게 개화(開化)의 기운을 싹트게 하고, 생각을 하게하고, 꿈을 갖게 했으며 시대와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했다. 우리는 조국 광복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근대 패권 국가들의 이해(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바사(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B.C. 464-424년경 치세)의 신임을 얻어 술 맡은 관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당시 패권국 왕의 신임을 받고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무너진 고국을 잊지 못했다. 어느 날 친척 하나니를 통해 고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 훼파되고, 성문은 불타고, 성벽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
죄가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은 분명하다. 죄는 행복감(?)을 주지만 그 행복한 느낌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어서 오히려 우리는 행복감에 목마르게 된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만족스럽고 행복한 듯하다. 마약이나 섹스 그리고 돈과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의 행복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속임수에 빠지고, 속는다. 그러나 확실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우려내면 말씀이 나의 성품의 씨앗 되어 주님을 닮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하지만 이것이 목표는 아니다.)산상수훈의 이 팔복은 예수님이 누리시는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너희도 행복하라.'는 주님의 마음이 이 팔복의 말씀에
산상보훈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이 말씀은 나를 내동댕이치는 듯 한 충격과 자신감을 꺾어 놓는다. 감당할 수 없이 너무나 높은 수준의 말씀 이어서다.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이방 사람들의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다.(마4:25)이들의 신분은 지체 높고, 잘 사는 사람들도 조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내 은사에 맞는 사역이다.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은사에 맞는 일이 아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는 그의 책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을 통해 성공하는 리더들의 특성과 건강한 리더십으로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소개하고 있다.선지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서 이 원리중심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위대한 역사(役事)를 완성할 수 있었다.느헤미야가 중시한
예수님은 어떤 교회를 원하실까? 또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 세상이 갖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 모습은 무엇일까? 신약성경의 교회는 에클레시아(εklé:zia)이다.에클레시아는 '에크'와 '칼레오'의 합성어인데 이는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불러 자유를 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죄악 속에 있는 사
압제와 억압 그리고 포로의 생활에서 해방되어 해방을 노래하는 수준을 넘어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가꾸고 세워갈 때이다. 이 자유와 독립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분명할 진데 하나님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의 길로 이 행방된 조국이 가고 있다. 하나님은 독립과 자유로 인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실 것인데 이 나라는 하나님을 떠나 차별금지라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금년 삼일절은 삼일운동 100주년인 것은 주지하는 바다.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의 역할도 컸지만 "기독교신앙 없이는 3.1운동이 없다"는 함석헌 선생의 주장처럼 기독교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 항일 시위의 핵심과 다이내믹스(Dynamics)는 기독교였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그 역사가 3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3.1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삶에 희망의 불꽃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당신은 정말 희망이 있는가? 그리고 그 희망을 나눌 수 있는가? 예레미야애가 1:1절 말씀이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