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계는 소련이 붕괴되면서, 미국을 일극체제로 하는 자본주의 보편질서가 성립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화라고 한다. 세계화의 꿈은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19-20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기독교 세계화에 뿌리를 두
1987년 1월 14일을 기억한다. 영화 이 상영한지 얼마 안돼 관람객이 585만명을 넘었다. 이 날은 박종철이 죽임을 당한 날이다. 박종철은 경찰의 고문에 의해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바르게 살았던 깨끗한 목숨, 불의를 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독재타도’를 외쳤던 의로운 목숨,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다짐
2년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한 당국자 회담이 지난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2018년 무술년 새해를 맞아 고 활두를 던진 필자로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새역사를 창출하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필자는 한국교회가 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서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새해를 시작하면서 한민족의 동질성회복과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꿈을 꾸는 백성이 되자고 제안한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한민족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평화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지금처럼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있을 때가 없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2018년 무술년 새해를 맞아 평화통일과 인류의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광야에서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의 공동체, 정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로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고발했듯이 억압과 수탈, 거짓과 불의 속에서 이스라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교회도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가장 적대적이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민족의 염원이며, 소원인 분단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
한국에서의 기독교선교의 핵심적 동기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전파라는 사명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복음선교가 서양문명의 전파라는 동기, 활동과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되어 었었다는 사실을 몰각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나, 장로교 선교사들은, 순수한 복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양문화의 전령자들이었다.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사람 모두
남북한 7.4공동성명은 통일논의의 제3대 발판을 제시했다. 하나는,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 또 하나는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천, 마지막은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 도모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72년 남북한 당국자들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헐버트 선교사가 있다. 그는 고종의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적인 처사임을 호소하는 서한을 미국에 전달하려고 했다. 고종은 미국의 침략성을 모르던 상황에서 이 서한을 보내려 했다. 헐버트 선교사 역시 미국의 정치적 음모를 몰랐다. 미국정부의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답변은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좋
한국교회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지난날 고난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있던 이집트의 광야는 어디이며,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듣고 증언자가 되었던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서울의 한복판과 잘난 사람들이 사는 분당, 강남, 일산은 아닐 것이다. 그 곳은 노숙자들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서울 지하철역이고, 인간대접을 받지
루터는 종교개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상적 방향을 가진 개신교 진영의 집단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1525년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루터는 영주편(가진자)을 들었다. 루터 역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했다. 농민들의 편에 선 종교개혁 좌파인 토머스 뮌처 등과 대결하며, 성만찬 문제(기념설과 실제설
“민에 의한 민족통일! 이것만이 진정한 통일의 길이라는 확신 위에 우리는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통일운동의 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한다”안병무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에서, 그리스도교의 통일운동에 대한 결단을 촉구했다. 그리고 민의 의한 평화적인 민
정치, 사회, 문화의 윤리적, 도덕적 기초를 상실한 적당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를 뒤 흔들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까지 불어 닥쳤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장로교에서는 총회장 선거이며, 감리교회에서는 감독선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한국교회 연합단체의 대표회장 선거이다. 이러한 선거는 자본주의적 목표달성을 위한 실천 철학에 기초해서 수단
세계인 모두는 핵폭탄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일본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군국주의 부활의 그늘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끌려간 조선의 노무자, 정신대, 학도병들이 아니었는가. 이들이 끌려간 곳에서 갖은 고통과 역경을 버티고 버텨 살아 돌아왔지만 그곳은 바로 ‘지옥’이었다는 사실. 이들을 전쟁터로 아니, 정신대로 내 몰았던
이제 한국교회는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분단의 현장에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한민족공동체의 평화와 자유, 정의를 위해 절대적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평화와 예언자들이 말하는 평화와 합치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주체로서의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호
한국교회는 영미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잘못된 기독교 이해를 더 이상 지향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가져다 준 식민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앙과 신학을 한국적 상황에서 재해석되고, 한민족의 ‘구원의 역사’와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구로 삼아야 한다. 한마디로 히브리민족들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 그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는 1905년 한일 을사조약을 계기로 외세들의 한국 침략을 인식했다. 그리고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인 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 헐버트는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외국 종교가 정치적 음모를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는 두려움이 퍼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 이상의 은둔국은 아니었다”
서양기독교 선교의 문제는 19세기 조선민족의 존망의 위기에 관련해서만 취급할 수 없다. 신학 자체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가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시작과 전진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조선민족의 존망의 위기와 몰락은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침략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일본의 한국침략은 근
기독교선교는 서양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정치 불간섭의 노선, 혹은 중립정책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삼았다. 처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정책’을 주창하며, 피압박 민족의 의식과 역사를 철저하게 몰각시켰다. 선교의 정치적 중립노선은 1897년 이래 미국에 의해서 요청되었으며, 1912년 신민회와 관련된 105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