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불신한다는 표현은 껄끄러운 일이지만 기독교에 다니는 자들 가운데 이런 비판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들이 있다. “ 나도 기독교인지만 기독교가 하는 일은 마음에 안 들어, 세상에는 굶주림에 처한 자들이 수도 없이 많고 전쟁으로 고통과 고난에 처한 난민과 이념 또는 사상과 정치적으로 핍박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자들도 넘쳐나며,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는 나라가 한두 곳이 아닌데도 교회는 건물을 저렇게 많은 돈을 드려 건축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푸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독교 신앙의 확산은 먼저 믿고 영혼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와 선교로 이루어진다. 이는 기독교 진리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을 몸과 영과 혼으로 전하는 복음의 전이 현상을 통해 일어나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가 설립될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초기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믿음을 생명처럼 아끼고 혹 고난과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날지라도 순교라는 결단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의 신앙은 성경에 계시 된 “29또 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또한 기독교의 존재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함에 있다. 죽음과 부활을 믿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 하는데 있어야 하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그 초점을 두고 생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따르는 제자들에게 “ 누구든지 자기
복음서에는 예수님 주변에 오랜 세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과 고난 속에 살아왔던 각색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바라보고 온 이들을 일일이 고쳐 주시면서 이 환우들이 몸이 아픈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셨다. 성경에 병을 낫게 하여 주면서 거기에 따른 대가를 수수한 기록은 없다. 기록에는 당시 병에 고생하던 자가 병을 완쾌되었을 경우 반듯이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며 보이러 갈 때는 예물을 가져가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에 예수님은 제자
105주년을 맞은 3,1절이 지금은 무늬만 3,1절이지 그 정신은 이미 기독교도들의 정신 속에서 탈색된 지 오래된 기분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당대의 신자들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살신성인의 신앙과 믿음으로 나라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었다. 일제는 최신무기로 한국 백성을 탄압하였지만, 한국인 가운데 기독교도들은 신앙이 곧 애국임을 내세워 총과 칼을 앞세운 일제 순사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오로지 태극기만 들고 무저항 투쟁을 벌였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을 가진 사유 가운데 하나가 나라가 위태할 때는 언
대한민국에는 일제 강점 이후부터 자라온 이념논쟁이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얼마 전 대통령 영부인의 고가 핸드빽 사건이 시중에 회자 되더니만 결국 모 목사가 여론의 중심에 있다. 그것도 계획적으로 대통령 영부인에게 접근해 몰래카메라로 찍어 폭로한 사건이라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인물이 기독교 목사이며 그것도 과거 행적이 친북한 인사였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문제는 왜 국가 원수의 부인에게 이러한 함정을 파 빠지게 하느냐이며, 북한을 지지하는 인사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영부인에게 접근할 수 있었느냐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2:26) 기독교인의 신앙이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진위를 가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질을 높여주는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교회는 신자들의 길을 바르게 지도하는지도 의문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중요한데도 그렇지 않게 보인다. 그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와 중직들이 한 일은 겉으로 보기에 교회의
주인과 종은 같은 사람이며 인격을 가졌지만 생각하는 의식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그의 신분을 존칭으로 높이고 존경을 표한다. 예수님에 대해 주님으로 호칭하는 것은 나의 영과 혼과 육의 모든 범사를 예수님에게 맡긴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주인과 종은 그 하는 말과 행동과 의식이 다르다. 주인은 매사에 스스로 결정하며 실천하는 습관을 통해 자신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러나 종은 스스로 실천하는 것보다는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서만 역량껏 완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
현재 한국교회는 사회 경제와 더불어 세계에 교회의 위상을 한 것 드높이고 있다.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위축된 느낌이 있었지만 다시 한번 더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필연적으로 올 것을 의심치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일제 36년간의 식민 지배와 6,25의 한국 전쟁과 419 혁명, 516 군사혁명, 518 민주화 등의 국내의 난재들이 성장의 발목을 잡았었으나 근면과 끈기로 이를 극복하여 파괴된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데 한국교회의 기도가 뒷받침한 것은 신앙인의 희생정신이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투철
칼빈이 과연 장로 교파를 장려했을까? 아니면 웨슬레가 감리교파를 권장했을까? 잊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교회(그리스도의 교회)(마태복음16:18)를 세우겠다고 베드로에게 약속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면 교회의 이름이 가지각색이다. 교회 이름부터 세속적인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으며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교회의 이름이 세속적 상업적인 냄새가 풀풀 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은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도자나 신자들이 작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 4천 년 동안, 신약 2천 년 동
지금 기독교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선교 200년이 된 한국교회는 현재 어떤 상태에 와 있으며 지도자나 신자들의 믿음의 순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깊이 돌아볼 때이다. 오랜 세월 기독교는 고등 종교로서 지위를 누려 왔으며 영혼 구원의 신앙을 고수하며 왔다고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도자와 신자들의 신앙의 순도가 성경의 계시에 따라 영혼 구원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선교 초기에는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신앙이 기독교 순수 신앙이 요구하는 신앙의 순수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아모스5:21-22)구약에 계시 된 아모스서는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통한 당시의 이스라엘 부패에 대한 경고의 음성이라고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난 오늘 현대 기독교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생각함이 틀림이
교회 건물 옥상에 매단 십자가는 어두운 사회를 비추는 빛인가 아니면 세상의 고질적인 악행을 녹여 정화 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주일과 모일 때마다 교회를 이룬 지도자들은 신자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줄 것을 역설하고, 신자들은 될 수 있으면 사회에 나가서 신자들이 해야 하는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를 권고한다. 어려운 문제는 말로 가르치기는 쉽고 내 귀를 가지고 듣기는 쉬워도 실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이다. 교회에 모여드는 신자들의 수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줄었다고 하더
한국 사회는 아직도 8,15 이전의 일본 식민 시대의 잔재와 6,25 동족상쟁의 잔재가 뿌리 깊이 내려 이해가 충돌하는 현장이다. 아마도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여도 끝이 날까 하는 염려다. 그러다 보니 현실 정치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거대한 이념과 사상이 벽처럼 쌓여 양 진영이 절대 화합할 수 없는 모습이다. 실제 싱식적으로 생각하면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며, 진보는 사회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 사회주의를 깊이 들여다보면 구소련이 이념으로 주창한 볼세비키 혁명을 이룬 공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양팔을 벌리고 손과 발에 녹슨 쇠못에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실 때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교회는 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양팔을 벌린 것은 하나도 없이 다 주었다는 의미가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흘리신 물과 피로 세워진 교회요, 사도들의 희생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계시한다. 그런 교회인데 지금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성경에 계시 된 초대 교회와 어느 정도 다른면이 있으며 교회의 형태가 초기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
성경에 의하면 교회의 출현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이천 년 동안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였으며, 신약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졌음을 계시하고 있다. 교회는 죄로 죽었던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여 죄인을 의롭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이룬 신자들은 죄는 죽었고 의와 선과 거룩함만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죄인은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운 자로 다시 태어난 자가 교회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진리다. 이들
세계는 지금 핵무기 확산으로 미래의 시계는 계속 앞당겨지고 있으며 이제 12시 4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최근 뉴스에 미국 3740여개, 러시아가 4300여개, 중국 470여개, 북한 30여개(170개예정)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인 지형을 보면 대한민국은 핵으로 둘러싸여 있어 삶에 대한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실정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대한민국도 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미국발 여론이 아주 민감하게 작용하기도 해 의미심장한 여론이다.한국기독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
요즈음 인터넷 기사에 소개된 글 가운데 하나는 인구 절벽으로 사라질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이 가장 선두에 있다는 기사다. 그럴 것이 지금 한국교회는 일부 중대형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회의 유초등부와 청소년부가 사라지는 중이다. 스포츠 뉴스에서도 초등학교에서 야구부와 축구부가 사라지고 있다고 하며 앞으로 5년 후면 프로 야구와 축구의 신인 선수를 뽑지 못할 위기가 온다고 하는 소식이다.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는 혼밥, 혼술이 유행 한지 이미 오래다. 한 수 더 떠 방송에는 “ 나 혼자 산다.” 라는 프로가 삼 사 십대 청년 장년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일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정치권의 불신임은 날이 갈수록 커서 본인도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 입법권을 가진 의원들이 자신들의 비리와 범죄를 감추기 위해 그에 대한 방탄 법을 자가 제정한다는 소문은 가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거론하기 민망스럽기도 하다. 윗물 격인 정치권의 유명인사들이 스스로 법을 어기면서도 빤빤한 얼굴로 하는 용어 중 정치적인 탄압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사실 국민은 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먼저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도행전1장8절에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복음 전도 흐름에 대한 표현이 바로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진 부분에서부터 물 동그라미가 퍼져나간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물 동그라미가 퍼지듯 퍼져야 제대로된 복음 전도가 된다는 의미다.이를 교회의 복음 전도와 연결하면 복음 전도는 너와 네 집부터이며 이는 교회 주변부터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교회 주변에 복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그 교회가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