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십자가를 상징물로 내세운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죽음이 없이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야 함이다. 근래에 기독교는 종교인지 특별한 사교모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질되는 중이다. 기독교 자체를 들여다보면 교회끼리 경쟁하느라 교회의 역량을 허비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작금 세상의 유소년과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은 저 멀리 가버렸고 남은 것은 지식만을 강조하는 형식적 교육뿐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식 질문을 통해 전인적인 자기 개발을 위함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으로 인성보다 지식만 암송하는 기계적인 인간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학교 교육을 통해 지식은 머리에 담았으나 인간으로서 사회에 살아가는 예의범절을 배우지 못해
사라진 유년부, 이탈한 청소년들, 무관심한 청년들, 교회의 허리인 가운데 토막이 부실한지 벌써 오래되었다. 한국교회는 서구 노쇠한 교회처럼 건물은 번듯한 기념비적인 문화재급 건물이며, 종교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관광객이 내는 입장료로 근근히 버티고 있으며, 겨우 초라한 노인 성도들이 앉는 긴 의자는 퇴색되어 썰렁한 느낌마저 주고 있는 모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를 성서는 “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하였다. 개개인의 삶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이는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계시한 말씀이다. 그런데 정말 교인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그 빛과 소금의 소명을 가진 자들이 모인 교회는 빛과 소금의 저수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성서에 계시된
매년 5월은 계절의 특성상 싱그런 계절이다, 만물이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겨우내 나목으로 외로이 벌거벗은 몸에 창조주께서 친히 지어 입히신 새 생명의 오색 옷으로 갈아입고 저마다 하나님을 향해 속내 감추었던 새색시 수줍음과 같은 꽃망울을 예쁘게 터트린다. 5월을 가정의 달인 이유는 이처럼 가정에 자라는 새 세대들의 모습이 바로 5월의 화사한 꽃망울과 그 푸
지금까지 교회 신자들은 세상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 영혼구속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사명이었다. 본래 교회는 하나로 계시되었는데 현대 교회는 성경해석의 차이에 따라 신학을 달리하는 분파가 수도 없이 갈라져 누가 옳은 진리를 전파하는지가 분별하기조차 어려운 시대이며, 기존 교회의 설교자들도 자신만의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해 범
얼마 전 알파고 등장으로 인해 의학계에 던진 충격적이고 의미심장한 기사가 있었다. 2040년대 의과대학이 문을 닫고 이에 따라 대형병원이 모조리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 2040년 병원 오디세이 ” (2016,3,20 인터넷 조선일보) 내용이다. 미래 인간 세계의 변형을 예고하는 무서운 내용이다. 고액연봉 의사 대신 로봇 의사등장으로 입력된 통계 자료에
지난번 세계적인 바둑 프로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두뇌 알파고의 대국을 온 국민이 지켜보았다. 전적으로는 4대1이라는 승부로 인간이 인공지능인 알파고에 패했다. 알파고의 속을 보면 1200여명의 인간 두뇌 결정을 알파고가 대신 내렸기에 이는 무리한 게임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인간이 기계에 지배를 당하는 시대가 앞당겨지고 있음에 대한 무서운 예감
지금이 절기로 부활절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에 참여하며 성령을 대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앙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십자가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나름대로 불신과 지은 죄를 금식하며 통회자복 하는 회개의 기회로 삼는다. 금년 사순절과 고난 주간과 부활절엔 예년처럼 연례
연일 메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어린이 살해사건 보도는 어린이들이 볼까 두렵고 세상 삶이 왜 이렇게 각박하게 돌아가는지 걱정이다. 다시 입에 오르내리기도 무섭고 끔찍하다. 미처 자신이 태어난 인생의 삶의 꽃을 피어보기 전에 그것도 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불쌍한 아이들의 생명과 영혼 앞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마음이다.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왜 밥을 굶기
3월은 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난 달이기도하다. 당시는 전국 종교인 중 기독교의 구역조직이 나라가 풍전등화 일 때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유일한 전국조직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나라 독립을 논하는 데에는 좌우도 없이 오직 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불운하게도 격지 말아야 할 6,25라는 전쟁의 괴물로 인해 남과 북이 분단으로 고착된 이후 이상스럽게 대한민국
젊은 남녀가 서로 마음에 끌려 결혼 후 자녀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자녀들이 장성해 결혼하면 가족이라는 둥지를 떠나 또 다른 새 둥지를 만든다. 부모들은 의례 그렇게 되겠지 라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러한 일을 당하면 감당하는 부모들도 있겠으나 대게는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를 두고 사회복지학에서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이들이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 6,25 남침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은 지나간 과거사의 역사 한 토막이 아니다. 지금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은 일제에 의해 끌려 강제동원 된 위안부들의 한(恨)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결과요, 보훈병원에서 지금도 아물지 않은 6,25 상처로 평생을 고통과 신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은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부천지역에서 목사의 가정 그것도 독일 가서 유학 한 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목사 중에도 엘리뜨 가정에서 여중생 딸을 폭행해 숨지게 한 후 11개월 동안 방에 방치한 목사부부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2014년 신설된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까지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같은 목회자 입장에서도 도저히 이해
시쳇말로 표현 하면 교회는 산으로 들어가고 절은 도시로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이 속된 표현은 교회는 사회와 격리 또는 담을 쌓고 타 종교는 닫혀있던 문호를 개방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렸었다. 웃고 지나갈 이야기가 아니라 두 종교의 실상을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눈부신 발전과 성장으로 지은 거대한 교회의 건물은 중소기업의 근로자들이 볼
지금 이 사회는 무관심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아들이 있는지 없는지, 성이 무엇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고 나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으면 이웃이 유령인간과 같다. 이스라엘의 전설 속에 있는 골렘과 같은 유령 인간들의 사회이다. 개별 아파트의 출입문에는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집임을 표시한 교패가
한국교회의 비젼은 성경의 가르침에 바로서서 성경에 계시된 초대 교회의 경건함을 그대로 간직함과 드러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가 2천년이 지난 오늘과 그 시대 신앙과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의 골이 깊다. 신앙은 진보적으로 오늘 보다 내일의 신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야 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
정치인들이 선거유세 중에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들의 입에서 막말이 나올 경우 그 정치인 비판 하는 대상에 대해 비판하는 정치인과 같은 마음이라면 박수를 보낼 수 있겠으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인의 막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요사이 야당의 중진 정치인이 국가 원수에 대해 " 000이는 애도 나아 보지 않았다. " 는 막말에
마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룬 그리스도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했으며 또한 찾는 이가 없는 협착한 길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만 했으면 한국교회가 오늘 날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소외됨과 찾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전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교회의 겉모습은 휘황찬란하고 거룩하고 웅장하고 신령한 모습 같이 보인다. 그러나 내면은 교회가
한해 저물어 가는 년 말에 교회는 올 한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감당했는지를 십자가를 보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 혹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제치고 사람들의 생각대로 진행하였다면 교회를 이 땅에 세워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앞에 속죄해야 한다. 더욱이 성도들의 거룩한 헌금을 어디에 어떻게 정확하게 사용했는지 밝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