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제자들이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눅 17:5-10). 이어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들고 있다. 예수께서는 왜 ‘작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했을까?
기원전 8세기 유다 왕국 때이다. 무역으로 다져진 신흥 부자들은 권력과 밀착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농토와 집을 수탈하는 악폐가 극에 달했다. 부자들의 탐욕과 포악성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당시 예언자로 활동한 미가는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자들을 향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미 3:1-3) 다며 식인종으로까지 묘사한다. 미가의 언설 가운데 “내
고대 이스라엘의 대 예언자 엘리야가 수를 다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되었다. 엘리야는 자신이 떠나기 전에 누군가를 후계자로 세워야 했다. 당시 선지학교에 수많은 예언자 지망생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엘리야의 주목을 받은 수제자는 엘리사였다. 엘리사는 당연히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엘리야의 생각은 달랐다. 수제자라고 해서 후계자로
인류 역사상 모세만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정치 지도자, 고난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혁명가이다. 그처럼 위대한 인물인데도, 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쓸쓸하다. 그를 위해 남겨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다. 그가 바랐던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그의 무덤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가 떠났다고 세상이
복음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를 변화시킨다. 개개인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사람들을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이 두 가지 사역에 치명적인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개개인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왜 그럴까? 오늘날 교회들은 죄인을 눈물로 통회케 하는 일이 없다. 사회 구조적인 죄악을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향해 반역을 도모할 때이다. 압살롬은 교묘하게 아버지의 정치적인 약점을 이용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직접 민생을 챙긴 것이다. 그러자 평소 다윗에 대해 소외감을 지닌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자상함과 겸손함에 마음이 끌렸다. 마침내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거사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헌신을 어떻게 설명할까? 헌신을 성공과 견주어 보면 그 뜻이 좀 더 명료해진다. 참된 헌신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제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성공은 야망과 집념의 결과일수는 있어도 헌신의 결과일 수는 없다. 세속에서의 성공은 오히려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외면한 결과일 수 있다. 공직자로서 요청받는 지도력은 어떤 일에 성공한 사람이 아닌 공적 직무에 헌신하
마태와 마가는 한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집단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마 8:28-34; 막 5:1-17).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줄곧 ‘우리’ 라고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 예수께서는 ‘우리’ 라고 말하는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 이름은 군대”다. 그의 대답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두고 했다는 ‘배반의 정치’가 정치권을 혼잡스럽게 하고 있다. 배반이라면 유다를 빼놓을 수 없다. 유다가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예수를 이용하기 위해 제자로 위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유다는 예수의 마력(?)에 끌려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유다는 남다른 열정과 현실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유다가 스승 예수를 배반한 동기
부활절을 목전에 두고 사진기사 하나가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두산그룹 계열 두산모트롤이 명퇴를 거부한 직원들의 책상을 벽면을 향하게 한 사진이다. 회사는 1시간의 점심시간과 오전오후 15분씩 두 차례 휴식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벽을 보고 앉아 하릴없이 대기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업의 슬로건은 ‘사람이 미래다’란다. 문제는 두산그룹만이 아니라는 데
수께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에 대해서 “화가 임할 것”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이신 적이 있다(마23:13-36). 왜 그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셨을까. 위선자로 지목된 이들이 누구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앞장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다. 겉모습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인데 속은 그게
예수께서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이다(요 10:22-33). 유대인들이 몰려와 예수를 에워싸고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라’고 다그친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데도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니!’ 라며 예수를 돌로 치려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하는 말, “선한 일로 우리가 너
인간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때를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전도서가 들려주는 예화가 있다. 한 작은 성읍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 성안에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그 성을 구했음에도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를 기억해주는 이가 없
환경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성경에서도 환경이 바뀌었으니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라고 한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고. 이스라엘은 바빌론 포로생활의 실패와 좌절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역사를 외면하고 살았다. 게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재물로 사려고 하는 그릇된 습관에 젖어 있었다. 이들
예수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힐난할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2:19-20)고. 혼인예식은 하늘과 땅이 상합(응)하는 의례이다. 기운이 승할 때이다. 먹고 마시며 기뻐해야 할 때이다.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오신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즐겨 사용하는 슬로건이다. 역시 행복이 보장된 삶에 대한 은유로 폭넓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있다. 주로 대형 교회들이 벌이는 완벽한 종교 서비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서비스가 제공되는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의 주기에 따라 일어
저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참혹하게 멸망한 적이 있다. 후대 역사가는 그때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를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왕하 17:14) 라고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왕하 17:6-23).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고’ ‘목이 굳어’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듣지 않고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 주인공은 야간비행을 하다가 항로를 이탈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가족도 친지도 지상의 어느 것과도 교신이 단절된 허무의 공간에서, 외로운 별처럼 고립무원의 단독자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다시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고독과 절망에서, 아침이면 따뜻한 커피를 주고받던 지상의 식탁을 그리워하며 점점 멀리 사라진다. 프랑스
자비로우신 주님! 2015년을 보내고 2016년 새해 앞에 서서 주님께 손 모아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 뒤돌아보면 부끄러움뿐임에도 자비하신 주님께 또 다시 기도의 손을 모읍니다. 주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음에도 우리는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날들을 은혜로 살지 못했으니 주님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우리는 누가에게서 역사상 가장 큰 기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눅 1:26-33).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천함 가운데서 태어난 소식이다. 주의 강림을 알리는 천사는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동정녀 마리아에게로 보내심을 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거처를 나사렛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정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마리아가 가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