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6:6)어떤 사람이 약속시간에 늦어 과속을 하며 차를 몰고 있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앞에 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 왔다.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속도를 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속 감지 카메라가 “찰칵”하며 촬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속도를 기준이하로 낮췄는데 카메라에 왜 찍혔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호기심 많은 이 사람은 다시 돌아가 속도를 낮춘 다음, 그 앞을 다시 지나갔다. 그런데 단속카메라에 자신의 차가 또 “찰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애완견을 돌보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인 사람은 자신이 먹는 것보다 개가 먹는 것을 더 챙기고 수십 만 원의 돈을 들여 개의 질병을 치료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 미쳤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의 번영이나 독립,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과 목숨을 내놓습니다. 어떤 이는 철학적인 이유로, 어떤 이는 경제적인 이유로,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문명퇴치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 독거노인을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큰소리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입니다. 즉,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리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많은 전투에서 때로는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최후의 승리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를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있어서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활에 대해 약속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빛이 밝게 비추는 곳으로서 어두움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있고 우상 섬김에 대해서 타협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과거에는 죄인이었으나 그것을 회개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함께 있으면 처음에는 온도 차이가 있으나 나중에는 곧 미지근해집니다. 교회는 악인과 선인이 타협하며 사는 곳이 아니라 악인이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미국이 합법적으로 동성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마음속에서 갈등이 늘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욕구가 있고 육체가 원하는 욕구가 있어서 그것이 서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에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예민하며 깨어있는 사람일수록 그 갈등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무디고 잠자고 있는 사람일수록 갈등이 적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우리는 모습은 육체의 욕구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교훈한 것들이 오늘날 목회서신서입니다. 세상의 많은 교회들을 보면 수 년 동안 세워진 교회가 한 순간에 잘못된 교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하루아침에 잘못된 교리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교회는 항상 수많은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따라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종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할 때 참 쓸모없는 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섬기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고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기고 그들의 종노릇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고 지식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종노릇한다는 말입니다.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할 때 참 쓸모없는 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섬기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고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기고 그들의 종노릇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고 지식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처럼 한번 세워지고 나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살아있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위험 가운데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한 이유는 에베소 교회에 위험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풀려나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에 갔는데 그곳에 어려움이 있어서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목회를 하는 디모데를 위해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기록 목적은 잘못된 교훈을 전하는 자를 경계하는 것과
부모가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순종’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었으니 이제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식에게 순종을 바라는 이유가 합당한 것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9)”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베푸시고 빛을 비추시지만 그 사랑 안에 거하느냐와 그렇지 않느냐는 다릅니다. 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자식을 사랑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있다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지만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조금씩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신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그 말씀에 온전히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수십 년 동안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주님에 대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생긴다고 신실하신 분의 인격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자가 편안히 사는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가운데서 성실하게 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그의 길을 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세상은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움과 죄악의 허망함에 미쳐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들에게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어두움의 길을 동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진실을 말해줘야 합니다. 또한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가 빛을 비추고 있으면 그들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들의 갈증이 심해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비결을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빛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이 곤고해지고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또한 주님께서도 요 15:18-19에서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수많은 일꾼들도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일꾼들을 핍박
처음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얻는 것도 많고 기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성도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기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실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것들을 발견하고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원 받은 자신이 이제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실망하고, 자신 안에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것들이 여전히 있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신앙의 길이 주님과
세상은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교회가 세상에서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도 사회에 나가면 정직하고 진리를 가지고 있는 진리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하고, 성도들의 입과 삶으로 진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진리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선교와 전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지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점점 그 목적과 말씀에서 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좋은 왕들이 세워져서 처음에는 온 나라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 곧 그 순수함에서 멀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와는 달리 점점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 등에 있는 커다란 예배당들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6장에 노아에게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멸망시키겠다고(창 6:13-17) 하셨습니다. 노아는 비가 오는 것도 보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가 들을 때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수치,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