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라는 말씀을 새기며 지금 하는 말이 저주. 비난 등을 하기 위해 말의 본질, 성격, 의미 등을 변개, 왜곡 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살펴보고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에드먼드 버크는(1729-1797) “악의 승리를 보장
조선 시대의 문인 소세양(蘇世讓)은 ‘송설체(宋雪體)’의 대가였고, 문장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고 인편을 통해 황진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편지에는 딱 한 글자 ‘석류나무 유(榴)’ 자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받은 황진이도 딱 한 글자짜리 답장을 써서 그에게 보냈다. ‘고기 잡을 어(漁)’이다.소세양이 보
레갑인은 미디안 족속이다. 모세 장인들의 후손이지만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를 따라 나와 가나안에 입국해서 함께 살게 된 족속이다. 또, 이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열왕기하 10장 15절에서 20절에 보면 예후 왕조 시대에 바알신, 아세라신,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완전히 진멸시키는데 한 몫을 한 자이다.요나답이 자기 자손들에게 “너
예장 합동 서울북부노회 민찬기 목사(예수인교회)가 목사 부총회장 선거에 재차 도전한다.지난 103회 총회서 아깝게 낙선한 민 목사는 올핸 새로운 교단 100년을 향한 주춧돌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민 목사는 무엇보다 현재 교단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교단 미래를 위해 시급한 과제부터 해결해 나감으로 다시 도약하는 총회를 만들겠다는 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제자들과 여인들은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지만 예수님은 세마포만 남겨놓으신 채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제자들에게도 찾아오셨다. 그러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헬라어로는 “샬롬”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교회의 토대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스승의 길을 걸어간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순교다. 제자들의 순교는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죽음에 기초했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순교로 이룬 피 흘림의 결실이다. 기독교 하면 십자가가 표상이요 십자가 하면 희생과 죽음이 그 내용이다. 예배드리는 건물을 잘 지었거나 못 지었거나 크나 작
분열과 갈등이 만연된 한국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절대 하나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분열과 갈등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되라고 교육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만큼이나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며,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2021년 부활의 아침에 한국교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는 약자 보호법의 맨 앞에 언급된다(21-27절). 그 이유는 역지사지로 보면 명쾌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억압을 받았다. 언약법에서 나그네 억압 금지 명령은 다면적인 함의가 들어있다. 곧 그들의 불안한 신분 때문에 법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손쉬운 착취의 대상이 된다. 출애굽기의 ‘나그
1877년 알렌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 에 입학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1881년 6월 졸업할 때에, 알렌의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들 중에는 선교사와 목회자로 지원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해 9월에 콜럼버스에 있는 스탈링 의과대학(Starling Medical School)에 입학하였고, 1883
사람들은 먹는 재미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식당을 알고 그것을 먹는 일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순간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 음식이요 내 뜻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적당히 타협을 하면 대충 벌금형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도 있었고 탈출할 수도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도망을 가라고 권유도 했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마지막 진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떠나갈 시간이 되었다.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을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하는
85세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열 살 차이 나는 95세의 할아버지가 아내의 옆에서 병간호를 자처하며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아버지, 제가 어머님 곁에 있을게요. 아버님은 들어가 쉬시고 내일 다시 오세요.”자식들이 만류해도 아버지는 “아니다. 이 사람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 하시면서 아내 곁을 한시도 떠나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지만,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다. 마침내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다. 아무 흠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의 행적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었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대표회장=조성훈 목사) 크리스찬 골드파크 쉼터성지가 새롭게 단장하고, 기독교 장례문화를 친환경적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이 골드파크는 한국교회의 지대한 관심과 성원 속에서 새롭게 단장했다. 쾌적한 환경과 첨단기술을 갖춘 기독교 추모공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다시 첫발을 내딛었다. 이를 위해 2020년 10월 리모델링에 착수, 현재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800년 전에 이미 메시야로 오실 것에 대해서 예언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초림 예수님만 외친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까지 예언하였다. 또 창세기 20장에도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머물렀을 때 그랄 왕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셔서 아브라함은 내 말을 전하는 선지자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사건이 나온다. 아브라
지난해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인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올 스톱된 상황이다. 코로나19는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등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유독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방역당국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따랐지만, 몇몇 목회자와 교회의 일탈로 인해 예배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하지
쉰 살이 접어든 영조는 어느 날 운동을 하면서 몸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대학생 아들한테 팔씨름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당황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보니 턱없이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팔목이 꺾이려고 하는 순간, 아들이 살짝 팔씨름을 져주는 것이 느껴졌다. 아들이 분명 이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을 생각하면 씁쓸하고, 아들이 생각하면 기특한 마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부활승천 후 예수 그리스도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지 말씀하신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원수 마귀, 용이라고도 하고 옛 뱀이라고 하는 사단은 날마다 주의 택한 백성들을 향하여 정죄한다. 그러나 예수
3.1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에 대해 한국교회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한국개신교는 서양의 거대문화와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다윗문화에 매몰된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형태로는 한국교회가 역사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없다.3.1운동의 주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육체가 바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나서도 넘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육의 소욕이 적어지는 것뿐이지 육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가운데 괴로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