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구한말 조선의 정신적인 갈등, 사상적 방황과 지도층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 실학파의 구국운동이 실패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할 정신적인 중추세력이 표류하던 비극적 현상이다. 구한말 왕정 통치의 한계와 봉건제도의 패착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는데도, 개혁적 실학운동은 정치적인 격변에 휘말리면서 사색당쟁에 빠져 있었다. 충
체코 출신 ‘리다 바로바’는 1975년 독일로 건너가 단연 최고의 배우가 되었으나, 오랜 와병생활 끝에 2000. 10. 27일 86세를 일기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나치홍보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했던 ‘리다’는 그의 미모에 반한, 나치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유뷰남 ‘괴벨스’와 눈먼 사랑에 빠져 최고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2021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와 세상이 펼쳐진다. 지난해와 같은 날이 아니라 새로운 날이다. 지난날과 같이 코로나19로 인해 피폐해진 동일한 날로 여겨서도 안 된다. 분명 기독교도들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날이다. 코로나 19도 물러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몸은 태어난 그대로 육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새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쟁을 치르는 싸움터에서 진군하는 용사들과 같다. 성도이기에, 날이면 날마다 치러야 하는 영적 전투는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여서, 믿음이 좋다고 하여서, 시련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기에 더욱 절박하다. 본문의 싸움은 육적인 전쟁이지만
사람끼리는 절대로 하나 되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툼과 분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성령 없이 사람끼리 하나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고 교육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고서는 나의 존재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헌데 모두가 내안에 갇혀 자신을 섬기며,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께서 오셨다. 과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며, 어떠한 분으로 오셨는가? 오늘 우리는 이 성탄을 맞이하여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으로 오셨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예수님은 왕으로 오셨다.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누구냐고, 어디 계시냐고, 황금,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령, ’성령‘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성령을 교회의 복 방망이로 생각한다. 성령은 부흥사와 교회성장론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교회성장에 골몰하는 일부교회는 이웃교회의 교인을 데려오는 대가로 교인들의 이름 아래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하던 별을 달아주기도 한다. 한창 교회성장론이 교회 간에 경쟁적으로 일어났을 때는, 이웃교회의 교
역사는 갈등과 연합을 통하여 합종연횡을 거듭해왔다. 그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 먹어야할 음식이 놓여있다. 가뭄이나 홍수 등은 양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게 하는 변수다. 사람들은 먹거리를 찾아 이주하거나(창 12:10; 룻 1:1), 빼앗기 위하여 힘을 겨루었다(창 26:10). 양식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기 위해 더러는 위협하거나 연합하고, 더러는 상대와
4. 1884년, 갑신정변 토마스 선교사 이후로 16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던 한반도 땅에 마침내 빛이 비췄다. 안타깝게도,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변란이 빚어낸 혼돈 속에 있을 때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초부터 개화파의 중심에 있던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20대의 젊은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던 끝에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한 것이 있는데 너희 믿음 위에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 관제라는 것은 제물 위에 기름이나 향을 붓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난 호 계속)(2) 화환(花環), 위로금(慰勞金) 봉투 등의 기재위로금(慰勞金) 봉투에 기재하거나, 화환 등에는 전 호의 위로의 말을 참고로 하되, 필자의 경우는 ‘부활신위’[復活信慰, 부활의 믿음으로 위로 받읍시다(합니다)], ‘부활소망신위, [復活所望信慰, 부활소망의 믿음으로 위로 받읍시다(합니다)] 하는 내용을 주로 사용한다. 간혹 ‘성안신위’[聖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를 통해 순수한 진리의 보급이 성경의 계시의 근거로 그대로 전해졌다면 현재 아무것도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일이다. 성경을 경전 삼아 믿음과 신앙의 행위를 하다 보니 어떻게 하는 일이 가장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의 행위인지 그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시대 시대마다 성경을 자의적,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소개했다. 어떤 때에는 선지자를 대면하여, 어떤 때에는 간접계시로, 꿈이나 환상으로 다양한 시대에 여러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본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구약의 그림자 예수님을 신약에 펼쳐 놓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
“사단법인 한국교회연합 제10회 대표회장에 취임하게 된 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를 하나 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이념갈등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운명에 놓여 있다. 분열과 갈등으로는 선교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국민들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미래복지경영, 함께하는 사랑밭회(이사장=권태일 목사, 회장=최성균 장로)는 제6회 송엽 이윤구 사회복지지도자상 시상식을 지난 10일 한국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갖고, 송엽의 예수사랑, 인류사랑의 뜻을 기렸다.송엽 이윤구 사회복지지도자상은 국내외 사회복지계에 큰 획을 긋고, 소천한 고 송엽 이윤구 박사의 정신을 계승,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인재를 발굴, 공로를 치
아모스의 아들인 이사야 선지자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이다.이사야는 아모스, 호세아, 미가와 동시대의 예언자이며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들 시대의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특히 메시야에 대한 예언자였다.이사야서는 5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상과 환상을 예언한 내용이다. 유다 왕 웃시야로부터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기까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율법과 복음을 가르치고 병든 자에게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 많은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쫒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원해서 기쁨으로 쫓는 자도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기 위해 쫓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
70년대와 80년대 초 교회를 찾았던 노동자들은 천주교회를 거쳐 불교를 찾았다가 여기서마저 외면당했다. 이들이 종교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어야 할 종교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행복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항상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섰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아흔 아홉 마리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들, 지위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모두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교파주의에 매몰돼 분열과 갈등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이는 결국 자기 안에 갇히는 결과를
아론의 가슴에 판결 흉패가 있고 우림(םירוא)과 둠밈(םימת)이 그 안에 들어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물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29절). 구약에서 우림과 둠밈은 함께 4 차례(출 28:30, 레 8:8, 스 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