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기독교회는 세상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원하지 않은 고난과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할 피난처인가 아니면 어려움과 고난 위에 고통을 더 안겨 주는 피해야 할 근심덩어리인가?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의 존재에 대해 과연 필요한가 아니면 필요치 않은가? 그 해답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고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코로나19 이전 한국 기독교회는 인간의 생활 속에 꼭
급변하는 세계, 예측 못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 지식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 균의 칼은 창궐하는데 그 퇴치에 대한 인간의 백신 방패는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는 바이러스에 이길 백신을 만들겠지만 해를 끼치는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의 주기는 빠른데 비해 방패격인 백신 개발은 늦는 현실이 우려된다. 이로 인해 기저 병을 앓고
코로나19를 계기로 세상의 모든 질서가 바뀔 것을 미래학자들의 충고가 잇따르고 있다. 먼저 국가 간의 질서가 바뀌고, 출입국 비자가 까다로워 인적교류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으로 회복하기는 힘들 것 같다. 무역 장벽은 더 높아져 나라마다 통관 절차에 대해 신중하게 할 것이며,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자원이 빈곤한 나라들은 국민 소득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
신종 우환폐렴 바이러스(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세계의 지형뿐 아니라 국가 간의 협력과 교류도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변형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초강대국이라고 넘어 가고 약소국이라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외형의 강력한 힘인 재력, 인력, 군사력, 영토의 크기가 오히려 바이러스에 취약함을 보여 주었다. 인류 미래 학자들은 팬데믹 이후에 세계의
지금 나라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인해 개인사업 폐업과 직장의 무보수 휴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라마다 일정한 금액을 재난 지원금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형편이다. 재원은 국민들이 낸 세금이다. 얼어붙은 개인사업과 재래시장과 영세한 자영업자들에게 다소 활력을 불어 넣어 활성화 되게 하기
전 세계에 대 유행한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크게 변화될 것으로 예측하며 아마 코로나19가 끝이 오더라도 세계의 질서는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견을 각국은 조심스럽게 내 놓고 있다. 또한 팬데믹으로 인해 코로나19가 사회의 어떤 조건, 국가의 빈부의 차이도 , 인종 차별도, 종교 차별도 없이 모두에게 감염되게 했으며 감염에 대한 지형이나 지도도
지금 사회에는 나라와 인종 삶의 방식을 초월하여 코로나19라는 동일한 질병에 감염되어 생사기로에 놓인 확진 자가 일백만 명이 넘었다. 그중 기저 병을 앓고 있는 자중에 사망자가 5%를 넘는 나라도 있다. 코로나19는 나이 많고 적음에 차이를 두지 않고 전 연령의 생명을 유린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병과 기독교인들의 신앙과의 관계는 성경에 계시된 예수그리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임이 곧 교회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여 영혼을 구원 받게 하는 영적 소명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를 비롯해 세계 모든 교회들이 거룩한 성일에 신자들이 모여 공적인 현장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이는 것을 잠깐 동안 미루고 각 가정에서 개별 예배를 받아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에 갈등하고 있는 중이다. 잘못하면 교
사람에게는 난 날이 있으면 죽는 날 만 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거기에 애석하게도 좀 길게 살다가 가는 이와 짧은 인생을 자신이 원하지 않은 때에 간 어린 아기도 있고 청소년도 있고 청장년도 있다. 누구나 나이 많아 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원하지 않은 때에 가야하는 것 불공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그것은 내 마음대로
에스겔서에 하늘이 내리는 재앙에 대해 칼과 기근과 온역이 등장한다. 이는 나라를 잘못 이끈 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계율을 무시한 백성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종류로 알고 있다. 그중 두 가지는 이웃나라를 통해오는 전쟁과 자연 재해인 가뭄으로 인해 비가 오지 않아 오는 기근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온역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인간의 죄에 대
교회를 감싸고 있는 한국교회의 환경이 매우어수선하다. 사회정치상황은 좌우의 대립 속에 어느 편을 들 수 없는 엉거주춤한 모양이고, 교회 내도 이러다할 변화와 발전의 싹이 돋아나는 현상을 보이지 않고 그럭저럭 현상이 유지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듯하다. 수천 년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심지어 하나뿐인 목숨까지 헌납한 분들의 희생으로 교회는
칠팔십 년대의 급격한 한국교회 신자 수의 증가로 인해 팔구십 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부를 축척하기 시작했다. 교회로 모여든 재원을 자신들이 모이는 예배당 건축에 쏟아 붓기 시작해 교회의 건물이 기업의 사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부(富)티 나게 되었다. 교회의 재원은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의 재화가 신자들의 신앙을 통해 교회의 영적인 사역에 사용하기 위해
논어 편에 나오는 君君臣臣父父子子는(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오늘의 시대 특히 한국의 나라와 사회와 종교 특히 한국교회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논어 글귀를 한국 사회에 물어 해석하면 나라의 정치를 하는 정치인 가운데 수장격인 최고지도자는 지도
진실로 송구영신하는 믿음과 신앙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연초가 되면 같은 말이겠지만 이제는 신성한 교회에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와 분란을 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자. 부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말고 나부터 그렇게 실천하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매년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만 다짐 후 삼일이 지나면 다시 구습을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성경의 유추해석으로 가능하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몸은 영혼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게 인식되어 있은 현실이다. 신앙의 모체인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환이 필요하다. 성경에 계시된 교회로의 전환을 위해 모든 교회의 바른 인식이
왜 또 대한민국에 생활고로 인한 일가족 네 명 음독자살 사건이 일어났는가? 이제 명실 공히 대한민국은 개발도상 국가를 졸업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했는데 말이다. 국민소득이 금년을 기준으로 3만 불이 넘었다. 국민소득이라면 국민 전체 평균이 바로 삼만 불이라는 의미라고 본다. 그런데 자살한 가족은 왜 삼만 불에서 소외되어 온 가족이 자살을 선택하였는지? 도무지
시대 속에 교회의 존재 가치를 말할 때에 오늘 날과 같이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시기가 없었다. 현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집권당 정치인들로 인해 6,25 한국전쟁과 더불어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사상과 이념이 다시 살아나게 했다. 전후 70여년 세월 동안 자유민주주의 토양에 자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기도 하고 노인들에게는 섬 뜻 하게 생각되
나라가 온통 개혁세력과 개혁대상(?) 세력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소요가 연일 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과연 한국 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사회분열 양상이 극심하다. 419, 516, 518, 민주화 투쟁 등 큼직한 사건들을 겪을 만큼 겪었는데도 아직도 민주화 완성을 외치는 집권세력과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 간에 길거리의 정
얼마 전 국회의원을 세 차례 역임한 유능한 정치인 한분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사건 전 유명 연예인이 동료를 성폭행 하는 사건도 피해자의 고발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이 사건 전에 전 남편을 무참히 살해하여 토막 낸 시신을 여러 곳에 유기한 아내가 법에 의한 심판을 받는 중인 사건도 메스컴의 보도를 장식했
지금까지 교회를 시작했던 개척자들은 교회 이름을 작명 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전도로 한번 교회에 나왔던 예비교인들에게 교회 이름의 각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 성경에 교회 이름이 계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지혜로 교회를 한번 부흥시켜 보겠다는 의지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교회의 이름의 다양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