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감염병 바이러스의 모양이 왕관과 같다 하여 ‘코로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스, 메르스도 코로나였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는 감염경로, 잠복기, 치사율 등 실체를 알 수 없어 ‘신종 코로나’로 부르다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코로나19’로 명명했다. ‘코로나19’는 발병 두 달이 지났음에도 감염원이 어디인지,
요한이 전하는 수가성 우물가의 이야기(요 4:27-38).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갔고, 예수께서는 마침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잠시 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고, 먹을 것을 구한 제자들이 돌아온다. 조금 전 우물가의 여인과 마실 물을 중심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지금은 제자들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이 금년 로스앤젤레스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석권했다. 크게 축하할 일이다. 한국 영화로서는 새로운 역사를 쓴 날이기도 하지만, 동양계 영화에는 좀처럼 눈길도 주지 않던 아카데미가 최초로 동양계 영화를 정상에 올려놓은 쾌거이다. 그동안 아카데미 영화제는 ‘백인영화제’ ‘미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성전으로 향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발길을 돌려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여들었다. 집단적인 기억의 심장인 성전을 뒤로하고, 일상의 삶의 공간으로 모여든 것이다. 누가는 이 장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예루살렘성전에 집중되었던 소망과 기대가 일상의 삶의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다. 여기에 성령 사건의 혁명적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다. 비
정초가 되면 유대인은 가정에서 혹은 회당에서 전도서를 읽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세상의 이치와 삶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서다. 그만큼 전도서는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전 1:1-2). 전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 참으로 난감한 때가 있다. 성인(聖人)이라면 모르거니와,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는 어렵기에 하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이니 ‘아멘!’ 하고 응답해야 하겠지만, 응답한다고 해서 반듯이 그렇게 실천한다는 보장은 없다. 아멘은 아멘이고, 현실은 현실이기에 그러하다.
마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를 예수·그리스도·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이름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대에 걸쳐 기다리고, 바라고, 염원하던 공동체의 혼이 담겨 있다. 아기 예수는 자연인이 성장하여 큰 인물이 되신 것이 아닌 처음부터 한 무리의 염원과 세계 인류의 염원을 몸에 지니고 태어나신 것이다. 이 이름들 가운데 특별히 이 지
독일에서 활동하는 사회학자 김덕영 교수(카셀대)는 최근에 한국적 자본주의의 정신과 본질을 분석한 책 를 펴냈다. 에리식톤은 신의 저주를 받아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껴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그의 책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에도 돈과 물질적 재화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여전히 배고파하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감탄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지은 모든 것, 곧 그 앞에서 형태를 갖게 된 모든 것들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하고 아름답던 창조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선함과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 세상은 다시 빛을 잃고 어둠의 포로가 된다. 존재했던 것들이 비존재가 된다. 여기저기서 빛
지난 9월 18일 [시사저널e](한다원 기자)가 고용노동부 자료 ‘2019년 1~6월 산업재해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다. 올 상반기(1~6월) 일터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져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노동자는 총 1115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 1073명에 비해 3.9% 증가한 수치로, 하루에 사업장에서 약 6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
사도 바울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사용한 말이 있다. “죄가 나를 기만했다”는 것이다(롬 7:11). 죄는 항상 나를 기만한다. 가나안 정착 당시 미디안의 바알 브올이 이스라엘 병사들을 파멸시킨 고사가 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축제에 초대해서 미디안 여인들을 품도록 유혹한 것인데(민 31장). 군사적으로 막기 어려운 상대를 미인계를 쓴 것이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이다. 자기 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각자의 구원을 성취하기를’(빌 2:12) 간절히 부탁하는 편지를 쓴 일이 있다. 어린아이 같은 의존적인 믿음에서 어른의 믿음을 가지라는 부탁이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칭얼대는 믿음, 책임지지 않는 믿음이다. 어른의 믿음은 참고 기다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된 자의 표상이다. 그 부정된 자가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부패한 세상을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가 일으키는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짐작해만한 기사가 있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사람들은 이 기사를 통해 예수께서는 기도를 게
열왕기하서 4장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를 통해 일으킨 네 가지 기적이 소개되어 있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기적이긴 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경제적 빈곤과 노예생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 기근과 식중독, 죽음, 굶주림, 질병 등 고통의 자리에서 생명을 회복한 기적이다. 모두 하나님의 능력이 절망 가운데서 희망과 기쁨과 감사로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도피생활을 할 때이다. 마침 놉 성읍에 숨어들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구한다. 신전에는 제사 드리고 물린 진설병(陳設餠)밖에 없었다. 부정 타는 사람은 먹을 수 없는 빵이다. 그럼에도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준다. 다윗은 또 ‘급하게 나오느라 가지고 나오지 못해서 그러는데 창이나 칼이 있느냐’고 묻는다. 아히멜렉은
존 볼턴 미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일본을 거쳐 지난 7월 23일 1박 2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가 입국한 다음날 가장 먼저 한 일은 나경원 원내대표와 비공개 회동한 것이다. 나경원 의원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지만, 문재인 정부 발목잡기로 연일 대립중인 제1야당 원내대표와 가장 먼저 회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문재인 정부를 우습
아베 : 트럼프 형님, 이 무더운 여름 중국과 무역전쟁 하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대선 레이스까지 치러야 하고. 트럼프 : 고마워, 아베 동생. 동생도 수고 많지? 한국 때리기 하느라. 개헌선 확보를 위한 참의원 선거도 치러야 하고. 아베 : 저 아베는 형님 하는 대로 따라 하니까 별로 힘들지 않아요. 그보다 형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요. 개가 되어도 좋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 3:7) : ‘박해 받는다’는 것은 ‘원수들’과 직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직면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박해도 없다. 그러나 무엇을 향한 직면이며 도전인가이다. “박해받다”는
오스트리아 출신 이론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는 폭력(전쟁)의 근원에 대해 의미 있는 해석을 내 논 바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이 상징화의 능력에 있다며 전쟁의 근원이 이념 혹은 상징의 충돌이지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신이 된 심리학]). 재독 철학자 한병철 역시 유사한 해석을 내놓았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