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 후로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논의들에 대해서 점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을 이기고자 했던 선진들에게서 큰 도전을 받았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되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1988년, 킹던 박사의 발표 직후에 그 자리에서 일본의 저명한 칼빈학자 와타나베 교수가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라고 주
극심한 고통과 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다면, 성도는 십자가 위해서 인내를 보여줄 수도 없다. 가난 때문에 고통을 당하거나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치욕으로 찔림을당하거나 죽음에 대한 위협을 당하는 일이 전혀 없다면, 용기나 절제가 과연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를 통해서 또한 성도의 인내가 드러난다. 아주 예리하게 찌르는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20세기에 저명한 개신교 역사학자 에밀 레오나르드(Emile G. Léonard, 1891-1961)는 “새로운 문명의 창안자”(founder of new civilization)로서 “새로운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a new type of man, the Calvinist)라는 명칭이 칼빈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 평
1541년 『제네바 교리문답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매우 강조하였다. 칼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요 17:3)는 표어를 강조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신앙심에서 거룩한 두려움과 존중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오직 계시의 말씀만이 제시하는 것이요, 참된 지식
우리가 교황의 신부들에게 저항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머물러 있어야하고, 오랫동안 지켜져야만 하는 교회의 질서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적 진분을 왜곡시킨 사람의 사악함에 대해서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추궁해서, 참된 질서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칼빈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를 끊임없이 느끼게 하도록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풍성하고 가득차 넘치도록 우리의 심령을 가득히 채운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여기서 문법적으로 형성된 교훈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어거스틴의 해석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교정을 추가하였다.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이라서 우리가 강한 능
잉글랜드에서는 1536년과 1549년에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잔인한 보복이 가해졌다. 1535년에는 독일 뮌스터에서 재세례파가 멸절을 당했다. 노르웨이, 스웨덴, 네델란드,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안 개신교들이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이런 치열한 대립과 혼란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보내신 것이라고
2) 츠빙글리의 순교 16세기 유럽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안 속에 처해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그 누구도 극심한 살해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극한적인 대립의 연속이었다. 1522년 겨울, 쮜리히에서 일단의 성도들이 모여서 로마가톨릭에서 제정한 금식주간의 음식규칙을 어기고 집주인이 제공하는 쏘시지를 먹었다.
1) 파문을 당한 루터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전체 진행과정은 각 지역이나 국가마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교리가 다른 여러 그룹들 사이에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교회를 놓고서 엄청난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핵심교리는 모두 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재발견과 확신에서 나왔다. 특히 어거스틴이 강조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
종교개혁을 연구하면서 킹던 박사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고 신앙적인 성과를 잘 되살려냈다. 당시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견고한 저항정신과 신앙의 내면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고 진단하였다. 미사의 우상, 성찬의 우상들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확신을 가졌다. 우상숭배를
타락하기 이전에 인류는 선한 의지를 가졌으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한다하더라도, 죄에 의해서 얼룩져있다. 심지어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동기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의 의지는 자만심과 교만함, 자기 의로움과 타인에게서 오는 평판 등으로 얼룩져있다. 사람의 죄성은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능력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은 아
칼빈이 가장 주목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우상숭배로 전락한 모습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을 품고서 참된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그 나무는 잘라져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롬 1:18-23).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나 미신을 따르는 자들이나 각종 종교에 유혹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비록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일반적인 계시가 들어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다소 역설적인 조건이다.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합당하지 못하며, 극히 제한적인 범위에 이르지만, 그래도
칼빈의 인간론, 특히 인간의 본성에 관련된 내용에는 두 가지 내용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인간본성의 전적인 부패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해야할 용어이다. 이 전적부패라는 용어는 본성상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도 인간의 삶의 동기적 원리로 존재하지도 않고, 작동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전적 부패한 양심은 마비되어서 하나
에라스무스는 그 어느 때나, 어느 글에서나 결코 어거스틴을 칭송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아담의 원죄와 그 직접적 유전을 강조한 어거스틴과는 달리, 에라스무스는 『엔키리디온』(Enchiridion, 기독교 군사의 교본, 1518년)에서 오리겐의 인간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간에게는 창조성과 존엄성이 있음에 더 무게를
에라스무스는 인간이란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휴머니즘, 즉 기독교 인문주의 철학자였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지만, 그들의 이성이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손상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결코 기독신자의 삶에서 인간의 공로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루터의 반박은 어거스틴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추구하던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발적인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1519년부터 1524년 사이 독일 각처에서는 루터와의 토론이 쟁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학문적인 논쟁에 대해서 학자를 옹호하자는 입장이었다. 종교개혁과는 멀리 떨어져서 있던 기독교 휴머니즘의 대표자 주자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글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표명하
죄라는 것이 그저 단지 악한 행위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충분한 교육과 도덕적인 갱신을 통해서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전체를 잘 정비된 법률을 통제수단으로 관리한다면 불의와 불법을 약화시키고 건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국가에서도 사람들의 조직이나 사회적 구조 속에는 악행이 전혀 그치지 않
“자유의지는 포로가 될 것이므로 죄짓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조치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의를 행하는데도 쓸모가 없다.” 어거스틴에게서 자유란 선을 선택하고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을 칼빈도 역시 파악하고 있었고, 원죄의 영향력에 관한 논의
2. 어거스틴의 은총론 재발견 인간의 죄와 은총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종교개혁자들의 인식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을 살펴보자. 어거스틴(354-430)이 철퇴를 가했던 펠라기우스(425년 사망)는 5세기 서구 유럽교회 내에서 피조된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아담이 범한 원죄의 영향으로 오염과 죄책이 전체 인류에게 전수되어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