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보내실 때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이것은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와서 아주 신나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말하면서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은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라는 것만 아닙니다. 사전적 의미에는 "찬양하다"란 단어의 뜻이 "칭찬하다. 찬미하다. 존경하다. 갈채를 보내다. 인정하다."로 나와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찬양한다는 말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에게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나사렛 예수이다”고 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지 못하는 곳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곳에서 대단한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은 신기해합니다. 나사렛은 대게 배우지 못한 사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윗왕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주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것을
주님이 부르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어부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출 제자를 선택하시는데, 나아가 장차 열두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릴 자를 선택하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자질과 성격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육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넘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육의 소욕이 적어지는 것뿐이지 육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가운데 괴로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믿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믿음 얻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믿음 없거나 부족하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오직 믿음만을 얻기 위해서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결코 믿음은 우리 손에 잡히지도 않고 생산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
복음의 비밀이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죄를 영원히 사하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이 나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사건이었음이 믿어지는 복음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행동이 바뀝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복음을 받은 사람의 변화되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때 외로움 가운데서 홀로 사망을 맞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은 죽음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누구나 홀로 죽음 앞에 서서 무서운 심판대를 향하여 혼자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날에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리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우리가 믿는 대상인 주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했으니 나무 자체가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그 진액을 받아야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열매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높은 지위, 명예를 얻는 것일 것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람은 두 가지 굶주림과 두 가지 갈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육체적인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은 밥이나 고기처럼 먹어서 해결되는 위장의 굶주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육체적인 굶주림 보다는 영혼의 굶주림으로 인해 더 고통 받고 괴로워합니다. 주님께서 그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이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들은 바로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움직임을 살핍니다. 살피면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동물을 표적으로 삼고 공격합니다. 이것이 사자의 공격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게는 반드시 맡겨진 일을 행하는데 함께하는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혼자가 아닌 동역자들과 함께 맡겨진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사역 속에
마라톤을 보면 수백 명이 출발하지만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고대의 마라톤 선수들은 경주를 할 때 옷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경주를 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양육하실까요. 주님은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살아갈 세상이 참 험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세상에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잉태되면 뱃속에서부터 태교를 하는데
사도 바울은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말씀에서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는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쓸 때마다 자기 자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또 자신의 영적 수준과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옳다, 아니다 판단합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가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옳다 하시면 옳은 것이요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절대로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가 더 낫다고
미국이 합법적으로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합법화하면서 기독교 국가로 인식되어져 온 미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 20여개 나라에서 동성 혼인을 합법화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과거에 기독교 국가들임을 보면서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소돔 고모라의 남색과 같은 일들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러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따라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종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들이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하고 쉬지 못하게 하며 심지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모두 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