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 세상에 죄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죄 지으며 살지 않는 사람 없다. 사람의 사람됨은 바로 죄 ‘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항상 ‘그’가 아니라 ‘나’가 문제가 된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라고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시인에게 인생은 그 자체가 슬픔 덩어리이다. 의식하는 모든 것, 감각하는 모든 것, 붙잡았던 모든 것, 그것들은 잠시 동안의 꿈과 같으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다. 시인의 심중에 시종일관 흐르는 상념은, 인생은 유
인간의 생존은 다른 피조물과의 의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혼자서는 못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속세가 어지러워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고독하게 지내는 수도승이라 할지라도, 그가 필요로 하는 생존의 양식과 도구들은 다른 존재로부터 얻은 것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생산하고 제공하는 존재들을 대면하지 않을 뿐이다. 이 상호 의존적인 생존양식 안에 평화를 깨뜨리는 악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淨)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마음은 존재의 집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지성소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등대이다.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것이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음은 갖가지 변화무상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표현된 색채만으로는 그 진실을 알기 어렵다. 부정한 마음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그것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향한 치열한 내적 고투이기도 하다. 우리들 삶이 각양각색이듯, 저마다 겪는 시련과 고초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
세상은 모순과 비리로 가득하다. 정직한 사람은 구박을 받고, 불의한 사람은 큰 소리 친다. 그리하여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다. ‘세상살이라는 게 꼭 진실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이런 모순과 갈등을 꿰뚫어본 시인은 막연히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를 사모하며 선하게 살라고 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순에
양털을 얻기 위해 치는 양일 경우 목자는 자연스럽게 같은 양과 몇 년을 함께 살게 된다. 이럴 때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미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 못지않게 유대감이 깊게 된다. 목자는 양에게 이름을 지여 부를 정도로 양을 잘 알고, 양 또한 자신을 지켜주는 목자를 알고 따른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가서 안전을 확인하고, 위험이 닥치면
[변명1].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다. “왜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었느냐?” 아담의 대답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브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물으셨다.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변명2].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이다. 40여일 가까지 소식이 없자 그 사이 산 아래 백성들
자기 분수를 알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몽유병자처럼 이룰 수 없는 상상의 괴력을 끊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간다. 그들 대부분은 무언가 큰일을,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들 삶의 진실은 누구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이기 위함도 아니요, 어떤 영향을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성의 교두보를 확보하자마자 모세가 당부한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온 회중 앞에서 율법을 읽어준다(수 8:30-35/신 27:6-7). 모세는 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고 했을까?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다. 모세는 파라오가 노예들을 동원해 다듬은 돌로 쌓은 거대한 신전과 궁궐에 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1항이다. 민주+공화 즉 민주제와 공화제의 합체가 대한민국 헌법이다. 민주제가 자유와 인권 등 개인의 기본권에 가치를 둔다면, 공화제는 공공의 이익과 안녕 그리고 질서에 가치를 둔다. 이 민주공화국 정치사상이 어떻게 대한민국 헌법이 되었을까? 헌법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기도 한 조소앙(1887-195
마가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장면을 보여준다(막 2:1-12).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으나 ‘무리’(오클로스)가 많아서 예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가난한 이들이 더 화급한 이를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의도된 것은 아닐지라도, 민중 역시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자기들보다 더 비참한 이들을 배척한다. 오
사람이 절망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심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은 두 갈래로 작용한다. 상대를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과,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이다. 상대는 헤라클레스로 보이는데 자신은 메뚜기로 보인다.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이 그랬다. 심약한 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
출애굽기가 들려주는 한 끔찍한 이야기(출 2:1-10). 이집트의 왕 바로는 늘어나는 노예들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산파들을 시켜 히브리 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는 족족 죽이라고 한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둡고 슬픈 시대이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도 세상은 암울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에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일대에서 태어난 3세 미만의
예언자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유다 민족을 향해 인생의 성장과정(바이오 그라피)에 비유해서 말한다. “젊어서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고생스럽다고 자꾸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입술을 티끌에 대라”(애 3:29). 입술을 티끌에 댄다는 게 무슨 뜻일까?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다. 자기
페르시아아의 고레스는 바빌론에 억류됐던 유대인 포로 일부를 귀향시키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도록 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은 아닥사스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포용 정책을 펴고 억류된 유대인을 귀환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귀환하는 무리 가운데 율법학자 에스라를 포함시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도 돌보게 했다(에 7:11-26). 이로 보면 아닥사스다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지혜로운 청지기 이야기(눅 16:1-13). 그가 주인의 재물을 축내다가 발각된다. 그는 해고되고, 횡령한 재물은 변상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꾀를 낸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서둘러 불러서 채무 서류를 위조한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은 50이라 쓰게 하고, 밀 백 석을 빚진 자는 팔십이라 쓰게 한다. 주인의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이 애굽에 내려가…” 라는 말로 시작하는 신명기 26:1-11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지어 추수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리면서 낭독한 고유문(告由文)이기도 하다. 이 고유문의 핵심은 물질의 성화에 있다. 제사를 통해 성화된 물질은 소득이 없는 레위인들 그리고 그들
이스라엘의 신앙역사에서 항상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이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이 시대 변천에 따라 조금씩 진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죄의 성격이 인간의 무지와 악한 본성으로 인해 드러난 것들이다. 하지만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이 분화되고, 그리하여 예언자 시대가 되고, 제사종교 시대가 되면서부터 죄의 양상도 달라진다. 법이 제
전쟁의 개시를 하나님의 통치행위로 받아들이던 시대. 전쟁에 임하는 왕은 반듯이 하나님의 응답(신탁)을 받아야 했다. 마침 블레셋이 전차 3만에 기마병 6,000이나 되는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이다.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사울왕은 초조한 마음으로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 다급해진 사울은 자신이 번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