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늘 아래처음 본 문장의 첫줄 같다그것은, 하늘 아래이쪽과 저쪽에서길게 당겨주는힘줄 같은 것이 한 줄에 걸린 것은빨래만이 아니다봄바람이 걸리면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비가 와서 걸리면떨어질까 말까물망울은 즐겁다그러나, 하늘 아래이쪽과 저쪽에서당겨주는 힘그 첫 줄에 걸린 것은바람이 옷 벗는 소리한 줄뿐이다 오랜만에 정겨운 시어 “빨랫줄”을 읽는 즐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대학 노ㅡ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 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핏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십수삼 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아직도 잔설이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지역에 따라 눈이 조금
306호에서 새어나온 한숨이 멀리 몸 푸는 바다에 가 닿은 동안고로쇠나무 옆구리를 찔러 뽑아내는사람의 딸들허리에는 창 자국물과 피를 다 쏟은 빈 몸이언 땅을 깨우고 있다 - 시집 『맡겨진 선물』에서 발췌* 남금희 시인 : 이대 영문과, 대구가톨릭대학교(문학박사.), 경북대 초빙교수 * 수상 : 창조문예 아름다운 문학상. 기독시작품상 입춘은 생명의 봄의 입구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
벚나무 우거진 공원 어제 앉았던 긴 의자는 그대로인데사람은 가고 없다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를 내일매일 오던 사람 서로 만나 반기던 마음 놓고 간 사람들발걸음 끊긴 기다림으로 멍한 저 고독기다리는 게 숙명인 듯 체념해버린낡은 의자는 언제나 무심한 표정이다봄, 여름 그리고 가을 또 겨울 피는 기쁨 지는 슬픔다 겪은 세월 후무심마저 유정한 기다림의 인고다긴
새해 첫 기적반칠환(1964~)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새해 새날 어둠의 장막이 걷힌다. 꿈도, 희망도 함께 솟아 오른다. 어김없이 태양은 떠 오르고 사람들의 가슴에 설렘과 기대가 피어오른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날이 새면 우리들은 다시 떠났다길은 끝없이 멀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날마다 도보로 걷는 일에 지친 날들을힘겨워 무수히 쓰러지던 길어느덧 그 먼 길 다 끝나가고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끝이 보인다노을 묻은 회양목 덤불 넘어 햇살 바른 들길남은 두어 굽이 돌아가면바로 내가 당도할 나의 마지막 집 한 채마른 풀밭에 화강암 깎아 세운 문패가 보인다그 먼 길 끝에
우리가 눈발이라면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진눈깨비는 되지 말자.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사람이 사는 마을가장 낮은 곳으로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우리가 눈발이라면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편지가 되고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새살이 되자.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거나 무엇으로 남고 싶어한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어제의 날들은 검은 손길에 끌려가다 지친 걸음을 멈추고서녘 바다를 피로 물들이는 노을이 되어 붉은 눈물을 훔치며 사라졌습니다천지가 검은 천막 안에서 잠든 시간어두움이 서로 부딪쳐 깨어지는 소란으로 달빛 별빛은 잠을 못 들고 새들도 놀라 깨어나큰 눈으로 어둔 밤을 지샜습니다이제 날들을 묶은 바다 끝동에서 떠오르는 태양이한 해의 하루가 시작하는 일은시간을 잡고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희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바람에 흔들리며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삐 무언가를 좇아 걸어가는 발걸음들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애써 외면하며
개안(開眼)나이 60에 겨우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신(神)이 지으신 오묘한그것을 그것으로볼 수 있는흐리지 않는 눈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채색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꽃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 세상은너무나 아름답고충만하고 풍부하다.신이 지으신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지복(至福)한 눈이제 내가무엇을 노래하랴.신의 옆자리로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뒷박인데 생각하면
이슬비도 찬란하다불빛은 존재를 형광으로 물들이고록펠러 센터 광장에서 타임스퀘어 골목에 이어지는젖을 새도 없이 달리는 차들무인자동차시대를 향해 질주하는지닿아야 할 꿈에 드론을 띄우며창조의 끝은 어딘가밤새 불 켜고 머리 맞대는 사람의 도시블랙할렘의 평화를 딛고다문화 다인종이 내일을 위해 몰려온다-『들소리문학』 2016년 가을호에서 발췌오현정 :숙매 불문과.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잔고가 빈 통장처럼또한 얼마나 쓸쓸한가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가여운 내 사람아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매화 가지에서 눈녹이물 설핏 흐르던 봄의 향기 아슴아슴하고 여름 산의 푸른 이마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鯫), 잉어 추(鱃), 쏘가리 추(鯞)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여든 넘은 할머니의 인터뷰물방울처럼 톡톡 튀는 리포트 아가씨의 질문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면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으세요?아이고, 아무 걸로도 안 태어날끼라한 세상, 함지박 넘치게 벅찼구만고저(高低)를 버린 수평선 같은 할머니의 대답나는 걸레질 하던 무릎을 펴지도 못하고물 만난 한 조각 마른 미역처럼널널하게 풀어졌다방바닥엔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
고요는 힘이 세다 고요를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다 제 주장을 하지 않아 늘 소음에 시달리고 주눅 들고 내몰리는 것 같지만 고요가 패배한 적은 없다. 제 풀에 지쳐 소음이 나뒹굴 때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고요다. 고요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든 최종적 승리자는 고요인 것이다. 보아라, 고요가 울울창창 우거진 세계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스피드한 세상에 살고
지난 계절 내내 잘려나간 시간들이비로소 강물로 이어지고그 위에 당신이 실려옵니다사랑의 눌변을우황으로 앓던 그 세월이제야 놓임 받아내 영혼의 빈 잔에들어와 눕습니다수화(手話)로만 통하던 먼 하늘이 시간 낙엽이 흩날리지만갈수록 투명해지는 나의 청력내 안에 고여 있는 샘물, 아 당신이 길어가는 소리어제도 오늘도 당신이 길어가는 소리 < 『진안문학』 22호에서 발
옥상에 올라가메밀 베갯속을 널었다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햇빛 속으로 달아난다우리 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흙의 피가 묻어 있다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가을은 외갓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