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基本)이 되어 있지 않은데 능력이 일어날 수는 없다. 바른 기본을 가져야 큰 능력을 얻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와 같다.예수님을 누구든지 주님이라 부를 수 있다. 누구나 주님을 부른다고 해서 주님은 아무에게나 주님이 되어주시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여기서 '누구'는 마음으로 믿어 주를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을 괴롭힌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바로 서려하지 않고, 책망하는 예수님께 사회적인 권세와 조직력으로 도전하여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려 상처 입은(?) 그들의 체면을 다시 찾고, 예수
바울은 신앙생활을 운동에 비유했다. 일정한 코스를 따라 사력을 다해달려야 하는 레이스(경주)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경주의 기본이 되는 경기 원칙들을 지켜야 한다.첫째는 균형이라는 원칙이다. 마리아는 오랜만에 베다니의 자기 집을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언니 마르다처럼 맛있는 식사를 극진히 대접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어떤 교회를 원하실까. 또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 모습은 어떤 것일까. 신약성경은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표현한다. 에클레시아는 '에크'와 '칼레오'의 합성어로 이는 노예상태로부터 우리를 불러 자유를 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죄악 속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탄식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불러내어 소망을 주며, 암흑이 있는
모든 사회의 질서는 약속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약속의 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가 새로운 약속을 유발하게 한다. 이것의 구조적이고 공동체적이며 공공복리 적인 형태의 것을 우리는 법률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약속을 지키고, 또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기독교의 언약 성을 구구히 말하려는 자체가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가정에 임한 복(福)을 노래한 시편 128편을 “그리스도인의 결혼축가”라고 말한바가 있다. 그토록 복되고 아름다워야 할 오늘의 가정들이 거의 파선위기의 정점에 있다고 말해도 문제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듯하다. 이 시대와 이 사회가 성한대가 없이 찢기고, 파국으로 치달으며 이렇듯 고통의 소리로
선인들은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했다. 고통의 바다란 말로 고통이 끝도 없이 가득한 현세를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과 번민으로 가득한 인간세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고통의 바다를 파선하지 않고, 은혜로 잘 항해할 방법은 무엇일까? 고통을 이겨 낼 슬기로운 지혜 그리고 방법은 있는가.방법 중의 하나가 즐거움은 나중에 누리기로 하고, 부딪히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영적리더십이다. 좋은 리더십은 성경 말씀에 부합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성경이 명령하시는 대로 교회를 섬길 때 영적권위가 나타난다. 교회 안에서 영적 리더십은 감독의 직분에 중점적으로 주어져 있다. 감독은 오늘날 목사와 장로를 가리키는 직분의 명칭이다. 이 직분은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 일으키며 살아서 다시 돌아오리라!’어렵고 힘들 때 마다 새로운 재기를 꿈꾸며 외치는 리더들의 생존화두(話頭)다. 지금은 비록 패하고, 의지가 꺾어야만 하지만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기세(氣勢)로 지나간 패배를 반드시 설욕하리라는 각오가 담겨있는 이 구절은 중국 초(楚)나라 항우(項羽)와 한(漢)나라 유방(劉邦)과의 전쟁
모든 사회의 질서는 약속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약속의 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가 새로운 약속을 유발하게 한다. 이것의 구조적이고 공동체적이며 공공복리 적인 형태의 것을 우리는 법률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약속을 지키고 또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기독교의 언약 성을 구구히 말하려는
굉장한 그러나 이해가 안되는 그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너무 열심히 모든 것을 하고, 잘하는 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늘 시험을 봐도 당장 오늘 밤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잘하는데도 만족이 없고, 계속 더 열심히 해야만 하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그를 볼 때마다 답답하여 ‘왜 저렇게 열심히만 살까? 충분히 높은 점수를 맞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있고, 변해야 산다. 변화와 변질,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같다. 사전적으로 변화(變化)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 따위가 바뀌어 달라짐이고, 변질(變質)은 성질이 달라지거나 물질의 질이 변함, 또는 그런 성질이나 물질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뜻이 같음에도 두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는 전혀 다르다.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개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 베드로 안에 내재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고백을 서슴지 않고 했을 때,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흐뭇한 순간을 누렸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확인한 ‘이 때로부터’(마 16:21) 주님은 제자들이 예기치 못한,
예수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지만 예수만은 아니라는 주장이고, 이 주장에 세상이 환성을 지른다. 오직 예수만의 신앙을 고지식한 주장으로 치부하고, 독선이라고 몰아 부친다. '오직 예수'라는 말 자체를 거부한다.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의 진리가 있다는 다원주의적인 사상이나 가르침을 선호한다. 반면에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좁은 문은
인생이 속에서 자주 인생의 교차로를 만난다. 방향성을 가졌을지라도 교차로에서는 반드시 어느 길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교차로는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인생이 좌우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두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는 좁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길이다. 그 길로 들어서는 문도 좁은 문
교회에서 진리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 포용하고, 용납하여 형제를 세워야 한다. 견해가 다르다는 것으로 갈등을 유발해서는 안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우리가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기 위해 이 문제를 다루는 로마서 14장 5~12절을 배경으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원칙을 찾아낼
다윗은 하나님의 주신 권세와 행복과 평안을 육체의 정욕이 악용하도록 방심한 나머지 간음죄와 살인죄라는 무서운 죄를 범한 후 10개월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삼하11:27). 그 동안 다윗은 참회의 심정으로 읊은 시편 34편을 보면 몰골이 수척해질 정도로 고뇌하며, 자기 생애 가장 처절하고도 비감(悲感)한 날을 보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사울에게 그러했듯
그리고 평생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한국교회의 원로들은 오늘의 현실이 당신들께서 일구어낸 가시나무열매인 것을 인정하고, 그 어느 쪽에 속하여 기득권을 바라거나 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한쪽 편들기를 거부하고, 한국기독교가 하나 될 수 있도록 진정성 있게 격려하며 사무엘처럼 거룩한 무릎의 지도력을 생산해 내야 한다.지금까지 한국교회의 하나 됨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거룩과 성결성을 지켜내고, 회복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한교연이 출범했으나 한국기독교의 연합기관의 분열로 얻는 것은 사실 미미하며, 우리 사회로부터 기독교의 신뢰추락과 함께, 주님의 몸을 찢는다는 비난과, 대정부 관계에 있어 한국교회의 통일된 입장을 전달하거나 대변해야 할 때, 구심점 없는 다변(多辯)으로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에 투영된 애국과 청렴, 비전의 이미지를 상실하고, 부패와 타락의 심화로 일반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됐을 때, 뜻 있는 지도자들과 학자들의 경고와 교회 내의 자정과 개혁의 목소리를 높여 [회개와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뚜렷한 대안과 회개를 통한 개혁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회복의 동력을 얻지 못한 채, 동동거리고 있는 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