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다양한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빛도 있고 보이지 않는 빛도 있다. 실제로는 보이는 가시광선보다 보이지 않는 불가시광선이 더 많고, 인체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불가시광선을 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넓고 진실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북왕국 여로보암2세 때이다. 불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에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남왕국의 아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북왕국에 올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자 북왕국 왕실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눈엣가시로 보였다. 아마샤는 아모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으나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밥 얻어먹으려면 네 고향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제자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스승을 스스로 찾아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감으로써 제자가 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사람을 제자로 삼지 않고, 당신의 선교 현장 곧 삶의 현장에서 만난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고뇌에 함께해줄 친구와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 물질이다.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가 있어도, 아무리 좋은 꿈과 이상이 있어도 먹을 게 없으면 공허하다. 출애굽 당시 굶주린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출 16:6)이라고 말씀하신다. 만나에 대한 약속이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서이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북쪽 세겜에 행차했다. 백성의 대표들로부터 선왕 솔로몬이 짐 지운 노역과 세금이 힘겨우니 경감시켜 달라는 청을 받게 된다. 궁으로 돌아온 르호보암은 신하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한다. 그러자 선왕을 섬기던 원로들은 왕에게 백성들의 청을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그러나 패기만만한
역경 가운데서 승리한 이들이 있다.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으로 승리한 이들이 있다. 모두가 존경할만한 이들이다. 돈과 권력으로 승리한 이들이 있다. 음모와 술수와 비굴함으로 승리한 이들이 있다. 잔인함과 폭력과 전쟁으로 승리한 이들이 있다. 그들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잠시 승리로 보일 뿐 추악한 승리이다.많은 이들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절치부
이스라엘의 신앙역사에서 항상 문제가 된 것은 ‘죄’이다. 그러데 죄라는 게 시대 변천에 따라 조금씩 진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법이 제정되고, 신앙의 형식이 갖춰지면서 죄도 예사로운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도록 정교하게 진화한 것이다. 예언자 운동은 바로 이와 같이 진화된 죄를 예리하게 간파한 데서 비롯된다. 이사야는 진화된 죄, 지능적으로 발달해서 남들이
예수님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듣는 이들이 하나같이 열심히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실제로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께 나아온 장면을 자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참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도무지 흥미도 없고, 알아들을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런 설교가 빈번해지고 길어
출애굽 백성들을 줄잡아 240여만으로 본다면 그 많은 무리가 가나안에 입주해서 각자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기, 협박, 공갈, 납치, 폭행, 겁탈, 도둑질, 배교, 살인 등 온갖 범죄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범죄들이 일어났을 때, 저들은 범죄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 민수기는 우리에
사악한 왕으로 정평 난 인물이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 22년간 통치한 아합이다. 그는 지은 죄가 막중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합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아합의 아들들과 이세벨이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 그 사이 아합에 맞서 목숨 걸고 투쟁했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제자 엘리사가
고대 이스라엘이 권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신명기에 있다(시 17:14-20). 가나안에 정착해서 불가피 주변의 열국처럼 왕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 이와 같이 하라고 그 조건을 열거한다. 이 조건들 가운데 왕은 평생 율법책을 곁에 두고 지키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율법책’은 왕의 마음을 다스릴 ‘믿음의 책’이라기보다 왕의 통치 행위를 규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자 요셉의 형제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전에 자신들이 동생 요셉에게 행한 죄악으로 인해 보복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창 50:15). 우리가 동료로부터 죄를 용서 받았을지라도 죄 자체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용서 받고 잊은 것 같았던 죄는 어떤 계기가 되면 되살아나서 보복의 두려움을 가중시키고, 마침내 더 큰 죄를 불
요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보면 속이 불편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 어느 한 가지도 곱게 말하는 게 없어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 이상이 남북정상회담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인식도 크게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판문점선언에 찬사를 쏟아내는 데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만
‘갑질’ 횡포를 겪은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 정신적 물적 피해를 입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땅콩회항’의 피해자로 수년 동안 외롭게 법정 투쟁을 하고 있는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의 인터뷰(2018. 4. 21., 경향신문). 땅콩회항 사건 직후 외상후 스트레스, 신경쇠약,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차라리 죽으려고 했을 때 당시 그의 큰누님이 갑상선암 말기였
동물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침팬지나 여우는 인간보다 더 영리하고 손놀림이 탁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침팬지나 여우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유연하게 협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협력하기는 하는데 ‘유연하게’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데 개미는 동료 간에 일사분란하게 협력은 해도 새로운 사회조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일벌들 역
야고보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살라고 한다(약 5:7-10). 한국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이 뚜렷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다. 1년에 두 차례 우기가 있는데, 10월 하순에서 11월 상순에 내리는 ‘이른 비’가 있고, 4월과 5월에 내리는 ‘늦은 비’가 있다. 농부들은 전적으로 이 비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누이동생 다말이 있었다. 이 다말을 배다른 큰 오라비 암논이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자, 압살롬은 졸개들을 시켜 암논을 척살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어찌 이런 일이! 다윗 집안의 비극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고, 막을 수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윗은 아들이 저지른 천인공로할 일을 모른 체했다. 원통하고 치욕스런 일을 당한 다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장면은 저 옛날 북왕국 지역에 있던 법궤를 남왕국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두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은 다윗에게도 예수에게도 중요하다. 또 참된 평화가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윗이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면, 예수의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두 군데서만 나타난다(행 11:26, 벧전 4:16). 이 가운데 베드로서신에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성격을 짐작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살인자나 도둑과 같은 범죄자와 같은 사회적 인식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것이다. 이로 보면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척결해야 할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형상화 한다. 처음 1-3절에서는 방언하는 능력, 예언하는 능력, 산을 옳길 만한 괴력, 세상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 등을 말한다. 모든 종교가 나름으로 지니고 싶어 하는 능력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비록 이런 능력들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