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교개혁이라 부르지만 일반 역사에서는 종교란 이름을 붙이지를 않고, 그냥 Reformation(개혁. 改革)이라 부른다. 교회의 개혁, 신앙의 개혁으로 시작되었지만 교회 개혁에 그치지 않고, 부패하고, 병들었던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운동이 번져나갔기 때문에 그냥 개혁운동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여긴다.1517년 1
오늘 우리 사회에는 감정이 위험수위까지 와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때나,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런 감정이 악한 행동으로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정화하는데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악에서 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 된 우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는 아랍 속담이 있다.햇빛만 있는 곳은 사막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질 때 거기에 생명의 환희가 일어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사막화 된다. 눈물이 없으면 그 웃음마저도 허탈 이상이 아님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신앙생활에서도 이 눈물, 애통이 차
현대인은 무겁고 진중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눈물, 애통'과 같은 말을 싫어할 뿐 아니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말이나 단어가 주는 어감이 마음에 부담을 주고, 그 부담을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
사사시대 말기 제사장으로서 성막(회막)에서 최고지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엘리제사장의 때를 사무엘상 3:1절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의 영성은 거의 바닥 수준이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의 신앙을 구하라. 이런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의 때에 땅을 주신다.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향해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 가도 온유함의 척도가 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특별히 자신을 비난하거나 대적하고, 모함하는 사람을 대하는 그 마음의 태도가 온유한자를
현대인들에게 ‘온유함’(gentleness)이란 단어가 그렇게 썩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온유함이란 성격이나 태도 등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성격이 부드러워서 남에게 싫은 말을 못하는 사람, 우유부단하여 일을 맡겨도 안심이 안 되는 사람, 굽실굽실 거리며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온유함이란 단어 속에서 느낀다. 온유한 것이 그리
우리네 속담 중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격언적 속담이 있다. 성경은 그 말을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고 하신다. 말씀의 원리를 따라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둘 것은 자명하다.공부와 연구와 그 어떤 일에 시간과 열심과 최선을 투자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고, 결과물을 가질 것
유대 민족이 처음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소년인 다니엘도 같이 잡혀갔다. 처음에는 궁정에서 시동(侍童)으로 일하면서도 시종일관 조국의 회복을 기원하며 이교(異敎)의 권력과 박해에 대항해 싸웠다. 후에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한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사자 굴에 던져지는 일을 당했는데도 하나님의 가호(加護)하심을 받아 무사
보편적으로 교회와 예배 당, 그리고 성전(聖殿)에 대한 구분력이 우리 한국교회에 없지 않으련만 애써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과연 예배를 드리는 교회라는 이름의 건축물이 교회이고, 성전인가?건물이 성전인 시대는 시대적으로 구약시대이다. 솔로몬 성전이 그렇고, 스룹바벨 성전이 그러하며, 헤롯 성전이 그렇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사역을 통하여 더 이상 성전은 그
법은 사랑의 발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율법을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으로 정의하셨다. 법은 사랑이요, 사랑은 법의 완성이다(요 13:34; 롬 13:10). 세상 법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수많은 법률은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고, 국민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이어야 한다.법을 위한 법, 특정한 소수만을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공포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法治國家)다. 법을 최초로 만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과 함께 우리에게 법을 주셨다(창 2:17). 에덴동산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법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계명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그때는 베드로가 아직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기 전이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요 21:15)에게 새롭게 불러주신 이름이고,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다.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는 변화가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을 나타내는 변화의 사건이 된다.
자신의 일을 소명(召命)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일을 자신의 삶과 구별할 수 없다. 소명을 지닌 사람에게 일의 목적은 그 일을 통해 소명의 깊은 성취(fulfillment)를 얻는 것이다.심리학에서는 소명에 대한 정의를 ‘다른 사람을 향한 가치와 목표를 주요 동기로 삼아 목적의식과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특별한 역할을 지향하도록, 자기 너머에서 기인하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영적리더십이다. 성경 말씀에 부합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교회를 섬길 때 좋고, 바른 리더십으로의 영적권위가 나타난다. 교회에서의 영적 리더십은 감독의 직분을 중심으로 주어져 있다. 감독은 보편적으로 오늘날 목사와 장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이 직분은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에게 주신
일천하기는 하지만 나름 세계문명의 발생지를 두어 곳 돌아보며 이렇듯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그 토록 찬란한 문명들이 만들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의 책 ‘도전과 응전’에서 “문명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덮쳐오는 도전에 대응해 성공함으로써 탄생하고 성장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다윗 왕조 유대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직전을 살았던 고난과 기도의 사람이다. 유대는 바벨론에 의해 3차례에 걸쳐 침공을 당했다. 1차 침공에서 바벨론은 총명한 귀족집안의 유대 소년들을 인질로 잡아 갈 때, 다니엘도 포로로 끌려갔다. 바벨론에서 다니엘은 조국이 2차, 3차에 걸쳐 파괴당하고, 심지어 자기 왕이 짐승처럼 포로로 끌려오
18세기의 혜성 같은 전도자 죠지 윗필드(1714~1770)가 없었다면 미국의 대각성 부흥운동은 크게 지장을 받았을 것이고, 미국 교회가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을 보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언더우드를 비롯한 복음의 사명자들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복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을 수가 있을까 싶다. 윗필드는
개혁(改革. reform)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을 의미한다. 개혁의 개(改)는 자기 자신〔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攵〕 고친다는 의미이고, 혁(革)은 가죽〔皮〕을 고친다는 의미이다. 고대에 가죽은 곧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계급과 신분을 나타냈다. 따라서 그 가죽옷을 바꾸면 다른 계급과 다른 신분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오늘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목적으로 사는 원칙을 가졌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명예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시시하게 살지 않고,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우리는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