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물방울이 가늘고 약해도 한 자리에 반복해서 물방울이 떨어지면 어느덧 바위에 홈이 파지고, 언젠가는 금이 가게 되고, 갈라지게 됩니다. 이처럼 반복적인 작은 일들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처음 출발이 비슷해도 좋은 습관을 따라 산 사람과 몸에 밴 나쁜 습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끝에 가서 현격한 차이가 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강
리스도인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분량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믿음이 성장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믿음 성장에 대한 열망과 사모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우리들이 사용만 한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영양분이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앉은뱅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 중 극히 적은 몇 푼의 돈을 주었을 것입니다. 몇 푼의 돈이 앉은뱅이 걸인에게 필요한 것인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금과 은은 없었지만 그가 가진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다 보면 너무도 자주 선택을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때로는 믿지 않는 가족들을 통해서 믿음의 양심을 따를 것이냐 사람의 뜻을 따를 것이냐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실한 성도들은 믿음의 선진들의 본을 따라서 불이익이나 곤란함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을 따라서 선택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더 큰 믿음을 얻어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나 이 믿음은 사람이 제조할 수 있거나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선과 도덕적 완전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열심히 봉사한 대가로 혹은 자선을 베풀었으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저울로 달아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지역을 섬기는 교회들이 섬김과 봉사로 이웃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신뢰를 얻는다면 건강한 지역사회,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지역 섬김이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지역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가 지역의 일원으로서 역량과 자원을 한껏 발휘해 지역의 필요를 돌봄으로써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효과를 보게 됩니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시간과 세월만 흘러가면 저절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소망하지만 어떻게 하면 믿음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시련과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할 시련들을 말합니다. 성경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또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섬겼고 결국 목숨까지도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모두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늘 자신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음을
성도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잘못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때때로 부모가 나
그리스도인들처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임은 찾아보기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또는 출신 학교가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고 하나로 뭉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섬기며, 같은 소망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이루겠다는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의 목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갈 때 아브라함의 목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약속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는데 그 다음에
신앙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 받고 그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삶의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구약시대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갖고 살았으며 또한 그들의 삶이 헛되지 않는 삶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에녹, 아벨, 아브라함, 모세 등의 삶에서 증명되어진 것은 말씀에 확신을 갖고 살아간 그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
어느 집사님과의 대화 중 들은 고백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예수님께 저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어떤 감정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는 희망을 잃었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저는 내가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의 삶을 통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삶을 정죄하게 되는데 그러할 때 그들은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온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시간 속에 묻혀버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무언가 제대로 이룬 것이 없으며 실패의 연속이며 정신과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과 경제생활의 압박감 그리고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리 탐탁지 못한 삶이라고 평가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주님 앞에 무릅 꿇고 자신들을 돌아본다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
재물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으로 살펴보면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에
우리가 반드시 닮아야 할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모습도 닮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할수록 마귀를 닮고 겸손할수록 예수님을 닮습니다. 우리는 스승을 닮고 위인을 닮고 성공한 사람을 닮으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겸손의 믿음이
사람들은 인간들의 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곤 하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생각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거듭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렘29:11)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히 주어지는 썩지 않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먹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