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속의 하나님, 성경속의 하나님은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예수님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예수님은 이들 가운데 계시면서, 이들이 대망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주체가 이들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헌데 한국개신교는 성경속의 하나님 역사하심, 성경속 예수님의 역사하심, 십자가의 정신을 몰각하고, 부자들만을 위한 종교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믿음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사람보다도 하나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동시에 부활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사순절을 보내야 한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절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는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성경 이사야 21장4절에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曙光)이 변(變)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고 기록되어 있다. 뉴욕 타임스
“오늘 대한민국은 경제, 정치, 외교, 문화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나라와 민족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말이다. 이럴 때 이 땅의 어머니된 민족의 어머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경제회복과 건강한 정치회복, 외교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청을 드려야 한다. 민족의 어머니들은 나라와 민족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마다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는 사실.오늘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였을 때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국론은 분열되고,
이웃을 사랑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인간 이하라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언제가는 무너진다. 결속된 유대를 포기한 공동체는 해체된다. 한사람의 아픔에 동정하지 않으면, 죽은 공동체이다. 무능한 인간, 보잘 것 없는 인간, 버림받은 인간을 어떻게 돌봐 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름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성장했다.교회는 세상의 빛이 됐다. 소금이 됐다. 한사람을 버리는 공동체는 100사람도 버릴 수 있다. 정신박약아. 불구자, 고통 받는 사람을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간다. 신뢰는 겸손과 성실, 그리고 근면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이 신뢰를 받으면서 산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이웃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신뢰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로 서로 신뢰하고, 신뢰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사회는 서로 불신하며, 비방하며 살아간다는데 안타깝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확연하게 드러난
계묘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늘이 열렸다. 폐쇄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열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이 열렸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평화를 상실했다. 로마평화(팍스)의 소리만 곳곳에서 들린다.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남북한 민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함께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남북한 민족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76년 동안 자기 것을 지키기에 바빴다.76년 동안 남북한 민족이 화해하지 못한 것은 한민족의 자존감을 상실케 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재물은 많은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를 보내고 성탄절을 기다린다. 혹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의 길을 우리 믿는 자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분명한 것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를 맞이할 수 있다. 성경 이사야 62장10절에서 12절에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기다리는 아기예수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땅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평화이다. 아기 예수는 가장 미천한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자기 안에 갇힌 욕심 많은 사람과 권력자 모두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는 짐승 곁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정·지위·소유를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기 예수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오늘 재물 욕심에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던져주는 말이다.오늘 한국교회는 자기 안에 갇혀 코로나19의 여파로 시련을 겪는 이웃의 아픔을 전혀 모른다. 살기 위해 노동
용산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사망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 목회자들은 SNS를 통해 용산 참사에 대해서 비난하는 글들을 퍼 나르기에 바빴다. 다음날 주일예배서 일부 목사는 용산 참사를 죄로 몰고 가는 설교를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일부 목사와 교인들은 용산 참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찾지 않고, 죄로 몰고 갔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서슴없이 “예수 믿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갔을텐데…”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설교“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하
사람을 설득하는데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3대 요소가 필요하다. 로고스=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가정 하에 인간은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나 합리적인 이치가 있어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장의 일관성, 이유의 논리, 증거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짜임새 있게 제시되었냐에 따라 로고스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된다. 간혹 논리적이라는 말에 압도당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하게말해서 논리적인 것은 내용의 앞과 뒤가 모순 없이 유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대한민국은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남북관계 등 매우 어수선하고, 불안하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 말을 보는 듯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매몰돼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구한말 정부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외세를 불러드려, 한반도를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도, 미국과 일본을 불러드려 대한민국의 운명을 외세에 맡기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의 의문을 사고 있다.북한은 때는 이때다 하고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서해와 동해에서 방사포를 쏘아대고 있다. 국민들은 불안하다. 갈 때까
일제 36년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간들이 독립의 주체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는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희생없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생각 할 수 없다. 그렇다. 씨앗은 죽어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희생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열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하늘을 향한 새로운 가치를 갖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 내일을 열 수 있다. 나 혼자만의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기주의이며, 공동체를 망친다. 때문에 인간은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
사람에게는 누구나 때가 있다. 그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치는 일을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그 때는 항상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찾아오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성장하던 때가 있었다. 이 때 교회가 질적성장과 양적성장을 함께 추구했다면, 오늘과 같이 마이너스 성장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한국교회는 양적성장만을 추구해 온 나머지 교인 개개인이 ‘마음의 정화’를 경험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성경전서 욥기 28장27절은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
광복절을 앞두고 낸시 팰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한민국 국회를 찾았다. 일본군 위한부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가 패로시 의장을 만나게 해 달라며, 국회를 찾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개처럼 끌려 나갔다. 이는 사회적 약자, 평생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 삶보다도 못한 삶을 산 한 많은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리지 않은 결과가 낳은 비극이다. 성경은 사회적 약자를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드린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이웃으로 수렴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이웃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은 하나
하나님은 애급 바로의 압제 밑에서 해방된 이스라엘민족에게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엿새 동안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렛날은 안식일,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니, 이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대로 안식일을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 이 안식일을 지켜 나가야 한다/야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
36년간 온갖 탄압과 수탈을 당하며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짐승취급을 받으며 악독한 일제하에서 노예같이 살아온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해방 된지도 어언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기조차 싫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아픔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독일은 전범국가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눈물로 용서를 구하며 현재까지도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고 있다. 그러나 간악무도한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숨기고 미화시키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못할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파렴치한 행위를 이어
미가는 남왕국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당시 앗시리아는 중동일대를 지배했다. 남왕국은 백성들 간에 분열과 갈등이 만연되어 있었다. 분열과 갈등은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곤궁한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라고 외쳤다. 예수님 역시 기득권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도덕성을 말하지 않았다. 사악하고, 기득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예수님를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을 논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실존주의 사상가인 사르트르(Sartre, 1905~1980)는 "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Choice;선택)이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며 살아간다. 이 고뇌 속에는 보람도 있고, 슬픔도 있다. 아픔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지난날의 과오를 잊고 산다. 그리고 모두가 잘난 맛에 산다. 인간,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적당히 살아간다. 이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는 자들이 적지
바울은 성경 로마서 6장 15-23절에서 “너희는 누구의 종으로 살 것인가”를 묻고 있다. 바울은 세상을 섬기는 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됐다. 바울은 세상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의 종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완성된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성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인간 모두는 죽기 전에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마음에 욕망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AI,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각까지도 대신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