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의학기술 역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20세기 의학의 목표는 모든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21세기 의학의 목표는 건강한 사람의 성능을 높이는 쪽으로 가고 있다. 따라서 평등주의를 지향하던 의학은 점차 엘리트주의로 향하게 된다. 최첨단 의학기술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얼마 전 서울대공원은 어른코끼리들이 물에 빠진 아기코끼리를 구해내는 감동적인 영상을 공개했다. 아직 채 한 살이 안 된 아기코끼리는 엄마코끼리와 놀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게 된다. 놀란 13살의 엄마 코끼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거리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이를 목격한 36살의 이모 코끼리가 재빨리 달려와 초보엄마코끼리를 이끌고 물속으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글을 쓴 장병욱 목사는, 한국전쟁 중 목사들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주의자들이 기습 남침을 감행해 26일 춘천과 강릉이 함락되고 포천이 붕괴되자 2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서울을 사수한다.”는 녹음방송만 남긴 채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 시간 종로 2가 기독교서회
히스기야는 남왕국 유다의 13대 왕으로 29년 동안 재임했다. 그가 말년에 중병이 들었다. 이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나아가 병이 회복되지 않고 죽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낙심천만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매달려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보아서가 아닌 당신과 다윗을 보아서 더 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초기에는 부족마다 힘이 세고, 지혜가 출중한 장수가 백성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백성들은 강력한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주변 나라들이 왕권을 바탕으로 약소민족들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진퇴양난에 처했다.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자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자기에게만 과도하게 몰두함으로써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줄 모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경고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의 신화 나르키소스 이야기다. 사냥꾼인 나르키소스는 뛰어난 외모로 남들이 베푸는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청년이다. 에코라는 숲속의 요정이 그를 사랑했지만 나르키소스는 그녀의 구애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수의 신은 나르
이사야에 의하면 세상이 두려운 자들의 생존방식이 있다. 거짓을 일삼고, 위세를 떨고, 농간을 부린다. 강자에게는 비겁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갖가지 우상숭배와 점술, 복술, 인신제사와 같은 해괴한 미신 행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사야 당시 백성들이 그랬다. 이사야는 그런 자들을 향해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사 44:2)고 한
탄핵정국이 가져온 대통령 선거도 끝났다.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 앞에는 나라의 운명을 가를 중차대한 일들이 산적해 있다. 경제, 교육, 복지, 안보, 노동, 환경, 인구, 빈부격차 해소 등 어느 한 가지도 화급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기대하고 싶다. 안보관이 분명하면서도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전기 기기 내부는 기기끼리 전기간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절연판이 있다. 일종의 차단벽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절연판과 같은 벽이 있다. 이 벽으로 인해 소통이 단절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일이 벌어진다. 더 나아가 형제와 형제가, 나라와 나라가 서로 갈라져서 분쟁하고, 원수가 되고, 적대시하고, 파괴를 일삼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의 남과 북은 그
출애굽 사건 기사 가운데 “내가 넘어가리니”(출 12:13)라는 말씀이 있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는 말이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 죽음에서 삶으로 넘어간 사건을 자자손손 기억하기 위해서 특별한 절기를 제정하여 기념한다. 유월절이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마련이다. 예수를 믿는 동기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다. 예수와 함께 한다면 암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원간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세상을 호령할 영광스러운 날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저들
임종을 앞둔 야곱이 12아들을 불러 각기 장래 일을 축복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창 49:2).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인물이다. 그럼 왜 야곱과 이스라엘을 말했을까? 고치 속의 애벌레에게 나비의 꿈을 꾸게 하는 것처럼, 야곱이라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머물러 있는 아들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의 일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요셉의 형들이, 이제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 엎드려 자기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걸하는 장면이 있다(창 44:18-34).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에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요셉이 친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좀 수상하다.
오스트리아 출신 이론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는 폭력(전쟁)의 근원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놨다.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이 상징화의 능력에 있다며, 전쟁의 근원이 이념 혹은 상징의 충돌이지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전쟁은 인간의 공격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결과로, 가장 분명한 인간의 형태가 우리의 상징체계로 나타난 것이다([신
나라 잃은 백성들이 태극기로 하나가 되었던 게 3·1운동이다. 우리에게 태극기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우리의 자존이었고 열정이었다. 나라가 없을 때 태극기는 그 자체로 조국이었다. 한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태극기로 국민을 길들이려 했던 아픈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태극기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순수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태극기를 이용하여 촛불민
영국 성공회 신부이며,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 그는 기독교는 ‘귀의 종교’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에게 경청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닌 ‘이중 귀 기울임’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쪽의 말과 저 쪽의 말을 함께 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이에 놓여 있으
정치의 계절이 갑자기 찾아오고 보니, 대선 주자들 가운데 유달리 ‘통합의 정치’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오늘의 국난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이 말하는 통합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형태의 통합은 절대 금물이다. 첫째, 익명의 무리로 사는 집단. 철새, 날파리,
골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 구스 사람, 블레셋 사람, 아람 사람 모두 원수요, 멸해야 할 족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암 9:7-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고, 다른 민족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보편주의가 담긴 말씀이다.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은
복음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예루살렘공의회(행 15장)의 결정이 있었음에도, 사도 베드로가 위선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 안디옥교회에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유대계-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자 베드로는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내뺐다. 스스로 이방인과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섰음에도, 막상 자신에게
16세기 일본의 작은 섬에 포르투갈인이 표류했다. 이들이 긴 총으로 멀리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은 총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그들의 말을 배웠다. 17세기 조선의 제주도에 네덜란드인 서른여섯명이 표류해왔다. 하멜 일행이다. 이들 중에도 총포 기술자가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생김새가 특이하다고 춤과 노래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