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잇슈는 성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시행해 내려온 성찬의 기능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에크가 루터를 짓밟고 핍박하면 할수록, 점차 교황권의 조치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만 갔다. 갈수록 더 낳은 의혹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는 6월 29일 권위에 대해서 설교했다. 마태복음 1
2. 아우크스부르크 대화아우구스부르크. 루터가 카예탄과 논쟁하던 곳이다. 또한 1530년 6월 25일 멜랑히톤이 작성한 루터파 신앙고백서를 카를 5세에게 제출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루터와 카예탄 (Thomas Cajetan)과의 토론이 벌어진 것은 1518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다. 루터는 1518년 5월에 교황의
점차 루터에 대항하는 로마가톨릭의 충성파들과 기득권자들의 탄압이 나타났다. 인골슈타트대학교 교수 요한네스 에크가 탄핵을 주장하면서 루터와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8년 2월 3일, 어거스틴파 수도원장 가브리엘라 델라 볼타(혹은 베네투스)에게 루터를 통제하라고 명령했다.1. 하이델베르크 논쟁(The Heidelberg Disputatio
제5장 루터의 95개 조항비텐베르그 성벽교회 출입문에 내건 95개 조항을 보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할 만큼 과격한 내용이란 별로 없다. 로마가톨릭 교단 내부에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 놓고서 논쟁을 하곤 했었다. 탁발수도회나 프란시스코 종단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종말관을 갖고 있었다. 도미니크파와 어거스틴 수도회는 매우 대립되는 입장이었
신통력과 기적에의 헛된 소망을 불어넣은 만성절은 성경에는 전혀 그 근거가 없다. 예루살렘 양문 밖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난 기적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은 아무런 비판도 제약도 없이 시행되어졌다.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만들면,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처럼 기적을 체험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먼저
95개 조항에서 지적된 것들은 훗날 루터가 작성한 스말칼트(Smalcald Articles, 1537) 신앙고백에서도 더 분명하게 비판되어있다.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율법이나, 공로에 의해서 얻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포함해서, 어떤 인간의 공로라 하더라도 죄를 감소시켜 주거나, 하나님의 면전에
루터가 섬기고 있던 비텐베르그 교회에도 그 전날에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든 성자들의 날에 아침 일찍 예배당에 들어가서 진열된 성자들의 유품과 유물을 대면하여 기도를 하고 있으면, 신통한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적인 신앙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만성절 날에 먼저 들어가고자 사람들을 앞을 다투어 하루 전날부터 교회 앞마당에 몰려들었다. 로마가톨릭
13세기에 유럽에서는 대학교육에 눈을 뜨면서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학습하면서 고전어 해독능력을 갖추었다. 헬라어를 공부하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문학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많은 평신도들이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맹목적 복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프랑
로마 교회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이는 교회의 조치들 속에는 물욕, 탐욕, 욕심들이 가득히 담겨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방 교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다. 과연 로마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목록을 만들라고 한다면, 어린 신학생들이라도 쉽게 지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직매매, 친족등용주의, 장기 부재, 복수임명 제도 등
이들 교황들의 관심사항은 정치와 전쟁, 예술과 문학, 사냥과 호화스러운 생활과 건축 등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도적 의무감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제 5차 라테란 종교회의(1512-1517)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진 종합적인 반성과 갱신의 기회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 회의를 통해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윤리를 갱신하기는 고
2. 도시집약과 자본체제종교개혁시대에 유럽의 경제체제는 완전히 전환점을 맞이하였으니, 도시지역에서는 정치적 자유도시들이 토대를 갖추었고, 소규모 자본주의가 발생하였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하는 인구 집중현상이 나타났고, 주택부족으로 도시 물가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인구가 갑자기 불어났기에 음식값은 6배나 올랐고, 목수와 노동자 임금은 두 배로 뛰었다
사람들은 세상이 어디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모른 채 살다가 사라지고 만다. 중세 말기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돌아보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 해도 결코 역사의식이 남다르지 못했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흐름들이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고, 엄청난 변화로 이어졌다는 말이다.1. 지역
관행을 혁파하는 루터의 고뇌에 찬 행동들을 몇 가지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집요한 로마 교황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희생적인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루터는 외부에서 밀려들어오는 비난과 가정 내부에서 겪는 아픔도 이겨내야 했다. 1542년 큰 딸 막달레나의 죽음으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후로 자신의 건강이 매우
루터는 뜻밖의 사건에 연루되었고, 결국 계획에도 없었던 결혼을 하게 된다. 1523년 부활절 저녁이었다. 시토수녀회에 소속된 마리엔트론수녀원을 탈출하려는 여성들을 만나게 된 루터는 자신의 마차에 숨겨서 독신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구출된 수녀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비텐베르그로 흘러 들어왔는데, 그 중 한
오랫동안 루터는 아버지 한스 루터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원래 변호사가 되도록 후원해 주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수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부요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냥 농사꾼으로 남기를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새로운 꿈을 위해 노력했다. 한스는 마틴 루터가 태어난 후에,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아이스레벤을 떠나서 맨스펠드로 이사를
3. 인간적인 삶과 가정의 회복면죄부 판매를 거부하는 루터의 반론이 나오기까지, 중세 말기에 유럽 기독교는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영웅 한명이 뛰어나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간 것이 아니다. 그 배면에는 14세기에 로마 교회의 수장이 두 사람이나 되는 교황권의 갈등양상이 나타나서 공동체의 균열이 있었다. 교황권의 절대
결국 성경적인 메시지가 사라지고 자기 교회만을 정당화하게 되면, 목회적 성공을 추구하는 상업주의마저도 분별하지 못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메시지에 경청해서 과연 우리가 누구인가를 겸허하게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예민하게 제시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적일 수 없다는 개혁자들의 성경
하나님과 인간과 교회와 세상에 대해서 정확한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인간의 지식과 사상을 능가하는 절대적 기준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체험이나 지식을 평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인 진리이며, 사람의 소리는 거짓일 뿐이다.성경에서 나오는 가르침에서 보면,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종교개혁은 서구 기독교회 사이에서 하나의 전쟁이었다. 서구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신앙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어떻게 성령이 교회 안에서 기능을 감당하느냐를 놓고서는 나뉘어졌다.칼빈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고 어두워진 인간에게는 오직 “성령의 내적증거”(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가 함께
16세기 종교개혁은 결국 사람들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을 깨워서 일을 도모하도록 도와주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패한 존재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단 한 번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지상에서는 완벽한 교회가 없기 때문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semper reformanda!)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