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고등학생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파트 주민이 선물로 준 것이라며 치약을 잔뜩 가져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버지가 받아온 치약은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한 유해물질과 동일한 성분이 들어 있어 식약처로부터 폐기처분된 것이었다. 학생은 그런 치약을 선물이랍시고 받을 때 고맙
러시아의 가난한 농민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은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오 흰 설원이여! /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예세닌은 첫눈을 맞는 소감을 ‘더운 피’로 표현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박해현은 “혹독한 추위는 사람을 움츠러
다윗의 고사다(삼하 7:1-17).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기는 돌로 지은 궁궐에서 호사를 누리며 살면서 하나님은 낡고 초라한 성막에 모시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언제 백향목으로 집을 지어달라고 했더냐”며 성전건축을 원치 않으셨다. 그보다는 먼저 너 자신의 속사람
어렸을 때 사금(砂金) 캐는 모습을 본 일이 있다. 금이 섞인 모래흙을 나무함지박에 담아 계속 물로 체질하면서 모래와 흙을 흘려 내린다. 마지막까지 체질하고 나면 함지박 바닥에 반짝반짝 빛나는 소량의 금가루가 남는다. 그걸 모아서 녹이면 작은 금괴가 된다. 금 섞인 모래흙을 흔들어 물로 흘려보내지 않으면 금을 얻을 수 없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는 “땅을
기원전 733년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이 밀려들자 유다는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처럼 절박한 때, 제 목숨이나마 구명하고 싶은 유다 왕 아하스는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사야는 승냥이를 막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극구 말렸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이나영 교수(중앙대/사회학)는 ‘종교가 인간을 버릴 때’라는 칼럼(경향, 17.12.11.)에서 한국교회를 실란하게 비판한다. 한국 사회에 평등과 인권 감수성을 도입하고 민주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해 온 기독교와 천주교. 엄혹하던 박정희 독재정권과 폭압적 독재정권에 맞선 이들. 19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 누구보다 앞장섰던 교회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보
전통적으로 대림절에는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촛불 하나씩을 더해가며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어지러운 세상에 오시는 주께서 참 평화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시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대림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 안의 ‘야곱의 생리’를 벗어
‘라틴어수업’으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킨 한동일 교수는 ‘진리가 무엇인가? 를 설명하면서, ‘진리’라는 표현이 태생적으로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학문하는 사람들도 많이 쓰지만, 유독 종교와 관련된 표현이 많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은 불가피 종교와 함께 이해해야 하는 용어라고 한다.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한자 풀이로 ‘종교(宗敎)’란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로부터 전해지는 절기이지만, 유독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그 유래를 미국교회로부터 전해 받았다. 하지만 미국교회의 세시절기가 우리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력의 토착화의 일환으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도 더러 있다. 최근에는 추수감사절의 본래 의미보다는 헌금에 주안점을 두고 교회마다 임으로 정한 날에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기도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소명 받는 장면을 특별히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아 산다는 게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고달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그가 편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피하는 게 정상이다. 예레미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갖가지 핑계를 댈 때마다 하나
모세 형제들의 이야기다. 모세는 최고 지도자이고, 형 아론은 제사장, 누이 미리암은 선지자이다. 셋의 성격은 제 각각이다. 모세는 사람 앞에서 타협하거나 굽힐 줄을 모르면서도 하나님께는 온유한 성품의 사람이다. 아론은 모나지 않은 부드러운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기는 했지만, 우유부단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 공동체에 위기를
성경은 삶의 궁극적인 답을 얻기 위해 지혜를 구하라고 한다. 지혜란 무엇일까? 욥은 이렇게 설파한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지혜라고(욥 28:12-28). 요한은 좀 다르게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라는 것이다. 요한이 말하는 ‘진리’와
우리에게 부딪치는 시험은 대체로 ‘이상’으로부터 오지 않고 ‘현실’로부터 온다. 이상은 누구에게나 고상하고 아름답다. 책임지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치열하다. ‘현실’은 얻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 우리의 믿음도 바로 이 ‘현실’로부터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출애굽 백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롬 7:19). 바울은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는 과연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분명한 ‘나’인지 자문하고 있다. 내 속에 또 다른 ‘나’가 있어 ‘나’를 주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끌고 가기 때문이다. 내 속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현대인들이 ‘전통사회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묻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것들 가운데 특별히 자녀 양육법을 눈여겨볼만하다. 당장 육아를 하고 있고, 조만간 부모가 될 부부라면, 다음과 같은 전통사회의 육아 방식들을 관심 있게 보았으면 한다.가능하면 즉각적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젖떼기를 최대한 늦춘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이다.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나 보다. 이럴 때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면 쓸쓸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정호승의 시 ‘부러짐에 대하여’ 한 토막으로 우리네 삶을 반추해본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아일랜드의 경찰관 로버트 버크와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윌스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최초의 유럽인 탐험대를 이끈 리더이다. 버크와 윌스는 낙타 여섯 마리에 3개월 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싣고 출발했지만, 메닌데 북쪽 사막에서 그만 식량이 떨어지고 만
‘어째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을까?’ 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시 ‘기술 선진국 중국이 왜 기술 후진국 유럽에 추월당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을 지배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해서가 아닌 환경 즉 일찍이 작물화가 어려웠던 토종 동·식물의 부족 때문이었음을 밝힌
진화론은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과 대척점에 있었고, 오늘날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진화론이 현대 과학과 인간 이해에 크게 기여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까닭은 그 사람의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닌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이는 백인은 흑인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수하다거나, 흑인은 백인보다
수가성 우물가의 이야기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던 예수께서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물 한잔 달라는 것으로 시작한다(요 4:5-26). 그러나 실제 이야기의 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가 되어서 상종 자체를 금기시 했다.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은 순탄한 삶을 산 여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여인을 상대로 유대인 남자